답 내리기 어려운 패션 ‘노팬츠’

최보윤 기자 2024. 4. 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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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질 대상인가, 추앙해야 할 자신감인가

손가락질 대상인가, 추앙해야 할 자신감인가. 최근 스타일에 개방적인 이들 사이에서도 수학계의 풀리지 않는 최대 난제 중 하나인 ‘리만 가설’만큼이나 답 내리기 어려운 패션이 있다.

지난해부터 패션쇼 무대를 장식한 ‘노팬츠 (no pants)룩'이다. 말 그대로 바지를 입지 않는 것이다. 완벽한 ‘하의 실종’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아마 그랬다면 이미 경범죄로 단속에 걸려 거리를 활보하지 못할 것이다. 바지는 안 입었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입었다고 보기에도 매우 곤란하게 느껴지니, 남자 삼각팬티 느낌의 짧은 하의나 엉덩이에 걸친 듯한 핫팬츠를 입은 모습이다.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 로에베에서 아예 남자 삼각팬티 같은 의상을 지난 시즌용 의상으로 내놓은 데 이어 미우미우, 돌체앤가바나, 페라가모, 발망, 비비안웨스트우드 등 유명 해외 패션 명품브랜드들은 2023 F/W(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노팬츠룩’ 패션을 선보였다. 패션쇼 런웨이에서라면 ‘쇼’ 의상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이를 리얼웨이(평소)에도 입고다니는 할리우드 셀럽이 계속 등장하니, 과감한 도전인지 무모한 시도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지난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디올 2024 봄-여름 오뜨 꾸뛰르 컬렉션에 참석한 배우 한소희. 시스루 원피스 안에 속옷 느낌의 의상을 배치했다./디올 제공

국내에도 그 열풍은 지나치지 않았다. K팝 인기 걸그룹 르세라핌은 해외 패션쇼 런웨이 의상 등을 벤치마크해 뮤직비디오에서 입고 등장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돌체앤가바나의 글로벌 브랜드 앰버서더인 배우 문가영도 돌체앤가바나 특유의 섹시코드에 맞게 시스루 의상을 입고 당당하게 쇼장에 등장해 전세계 팬들을 들썩이게 했다. 디올 쿠튀르 쇼에 참석한 한소희의 경우 브라 팬티 스타일 노팬츠룩에 시스루 상하의를 입었다. 감춘 듯 하지만 결국 조명이 있는 곳에선 적나라하게 속이 드러나는 의상이다.

물론 공연계에선 새삼스럽지 않다. 현재 최고의 팝스타로 꼽히는 테일러 스위프트를 비롯해 비욘세 등 톱 가수들은 수영복인지 의상인지 구분이 거의 가지 않는 보디슈트(위아래가 붙어 있는 원피스 수영복 느낌의 의상)를 입고 자주 무대를 휘어잡았다. 얼마 전 프랑스 자선 공연 행사의 피날레를 장식한 블랙핑크 리사 역시 몸에 딱 붙는 전신 보디슈트 느낌의 의상을 착용했다. 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부인인 브리지트 여사가 재단 회장으로 있는 자선 단체 공연으로, 리사는 로에베에서 특별 주문 맞춤으로 제작한 황금빛 의상으로 무대를 뒤흔들었다.

국내에서도 과거 엄정화를 필두로 이효리, 화사 등이 ‘노팬츠’ 스타일의 파격 무대의상으로도 등장한 적이 적지 않다. 이효리는 최근 토크쇼에서 엄정화를 향해 “언니가 그때 팬티만 입고 나왔다”면서 “뉴진스, 제니 등은 노출 의상을 안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려주고 싶다” 등의 발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팬츠룩은 패션계에서도 갑론을박이다. 과도한 노출을 지적하는 시선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겠지만 최근 새삼 부각된 것은 노팬츠 패션이 마른 사이즈만을 위한 패션이라는 비난이다. 요즘 다양성이 중시되는 런웨이에서도 유독 노팬츠룩은 마른 모델들이 착용했다는 통계도 있다. 해외 패션지 등에 기고한 해외 유명 스타일리스트들도 “패션쇼로는 멋져도 평상시에는 착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노팬츠는 또 다른 경기 불황의 신호라는 해석도 있다. 1960년대 경기 불황이 미니스커트 패션을 만들어냈듯, 장기적인 경기 침체가 예상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경제적 사회적 아이콘이란 것이다. 반면 코로나 엔데믹을 가장 잘 표현한 도구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미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해방을 격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의상에서 해방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바지를 없애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등장하듯, 사람들이 특히 수치심과 불안감을 느낄 때가 바지를 안 입었을 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션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노팬츠룩의 등장이 여성성을 강화하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란 의견도 내놓았다. 미 패션지 보그 등은 “노팬츠 룩이 등장한 건 바지가 과거엔 여성성을 억압하거나 여성성을 희롱하는 도구로도 쓰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거 바지는 (치마에 가려있던) 여자의 다리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1908년대 당시 한 남성지엔 바지 입은 여성들의 패션 화보를 싣고는, ‘갈라진 여자들’이란 제목으로 성적 대상화 하기도 했다.

바지는 1차 대전 이후 여자들이 생업전선에 뛰어들면서 주로 입기 시작했지만, 그것조차도 못마땅해하는 시선들이 많았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뉴욕의 고급 레스토랑들은 바지 입은 여성들을 출입 금지시켰다. 미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동명의 영화 원작인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자주 인용한 ‘라 코트 바스크’는 1960년대 당시 “바지 입은 여자들은 수영복보다 이 레스토랑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구를 내걸고 바지 입은 여성들을 쫓아냈다. 당시 유명 모델 겸 사회활동가는 그 자리에서 바지를 벗고 이브생로랑의 긴 재킷을 치마처럼 이용해 레스토랑에 당당히 들어가기도 했다. 실상에서 무리로 보였던 ‘노팬츠룩’이 알고보면 ‘바지 금지 시대’에 대한 희화화와 저항의 표시로 런웨이에 등장한 것일 수도 있다. 패션사적으로는 환영받을 만한 일이지만 그래도 입겠냐면, ‘yes’를 던지기 어렵다. 지금의 사회 분위기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22세기엔 또 다른 패션사가 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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