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되면 사표” 전두환의 태평양 정상회의 추진 막은 이 외교관

이하원 외교담당 에디터 2024. 4. 1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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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골 외교관’ 홍순영 전 외교부 장관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3회>]

전두환 청와대 비서관 되자마자 ‘추진 불가’ 보고서

YS 정권 실세에게 바른말 하다가 차관서 쫓겨나고

DJ 측근들 인사 청탁 거절하다가 장관서 경질돼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을 역임하며 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그간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주요 사안을 매주 전해드립니다.]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1999년 12월 28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출석, 일본인의 독도 호적 이전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지난 1월 취임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대한민국의 제 41대 외교부 장관입니다. 1999년 외교부를 처음으로 출입하면서 25년간 제 28대 홍순영 장관부터 총 14명의 장관을 관찰해 왔습니다.

이 중에서 외교관들이 가장 많이 거론하는 소신파 외교관으로는 단연 홍순영 장관이 꼽힙니다. 홍 장관은 김영삼 정권에서 차관으로 기용됐으나 실세에게 바른말 하다가 쫓겨나고, 김대중 정권에서 장관에 임명됐으나 대통령 측근들의 인사 청탁을 거절하다가 장관에서 물러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30일 77세의 나이로 별세, 곧 10주기를 맞는 그는 충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2년 고등고시를 통해 외교관이 됐습니다. 1970~80년대 비동맹 국가를 상대로 한 외교와 ‘북방(北方)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때부터 외교부 안팎에 선이 굵은 외교관으로 알려졌으며 선·후배들로부터는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불렸습니다.

홍 장관의 때로는 정권에도 맞서는 강골 이미지를 만든 1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1983년 외교부 아중동국장에서 청와대 정무 제1비서관으로 발탁됩니다. 당시 전두환 청와대는 12.12 군사 쿠데타 논란을 없애고 정통성 확보를 위해 태평양 정상회의를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 정상들을 서울로 불러서 다자 정상회의를 개최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홍 비서관의 가장 큰 임무가 전 대통령을 국내외에 띄울 수 있는 태평양 정상회의를 성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평양 정상회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고 추진 과정에서 무리한 일이 생길 것을 우려했습니다. 전 대통령의 환심을 얻으려는 좋지 않은 동기에서 이 회의가 제안돼 추진됐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는 비서관이 된 지 한 달 만에 ‘이행 불가’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에서 항명으로 비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깜짝 놀라서 이를 반려했습니다. 그러나 홍 비서관은 “잘못되면 사표를 내겠다”며 고집을 부려가며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가 출근해 보니 태평양 정상회의 이행 불가 보고서가 자신의 책상에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전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 대통령이 홍 비서관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보고 계획 추진 중단을 승인한 것이지요.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그는 같은 해 북한의 ‘아웅산 테러’가 벌어지자 이를 조기에 수습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99년 1월 22일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오른쪽)과 오구라 가즈오 주한 일본대사가 한·일어업협정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홍 장관을 각인시킨 두 번째 일화는 노신영 안기부장과 관련된 일입니다. 전두환 정권에서 안기부가 ‘외교 기밀 누출 혐의’를 이유로 당시 박건우 미주국장(현 북미국장. 나중에 주미대사로 활동. 작고) 등 고위 간부를 ‘남산(당시 안기부의 별칭)’으로 연행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치욕을 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외교부 장관이 유고에서 열리는 공산권 회의에 참석한다는 기사를 한 신문이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게 문제가 됐습니다. 박 국장이 안기부에 끌려갔었다는 얘기를 듣고 홍 비서관이 청와대에서 외교부로 달려갔습니다. 박 국장의 사무실에 가보니, 넥타이가 풀려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홍 비서관이 육두문자를 써 가면서 화를 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안기부장은 외교부 장관 출신의 노신영 씨로 그의 선배였습니다. 그는 “노신영씨는 외교관 후배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나. 나는 다시는 노신영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의 이같은 언행은 즉각 청와대와 안기부, 외교부 안팎에 퍼졌습니다. 노신영 안기부장이 그에게 연락을 해 다음날 아침에 만났습니다. 노 부장은 “나는 그런 일이 있는 줄 정말 몰랐다”며 “아무리 그래도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가 김영삼 정권에서 외교부 차관으로 일할 때 일어났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의 실세로 꼽히는 L 수석이 여러 차례 관련 부처의 장, 차관들을 불러서 김영삼 대통령을 국내외에 홍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홍 차관이 L 수석에게 항의했습니다. “외교부는 4~5년을 내다보고 정책 만드는 부서가 아닙니다.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하는 겁니다. 임기 5년짜리 정부 홍보하는데 외교부가 동원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나중에 정부가 바뀌면 어떡합니까.” 이 말을 들은 L 수석은 몹시 언짢아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L 수석이 홍 차관에게 “대통령 홍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크게 화를 냈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결국 홍 차관은 1994년 5월 사전 통보도 받지 못한 채 경질됐습니다. 한승주 외교부 장관이 그의 능력을 고려, 주유엔대사로 추천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청와대의 반대로 그는 유엔대표부 대사로 부임하지 못하고, 주독일대사에 내정됐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러시아 대사, 차관을 지낸 후 독일에 부임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다며 아예 외교관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를 아끼는 선후배들의 설득으로 홍 장관은 결국 독일에 부임했습니다.

< 홍순영 장관이 경질된 사연은 다음 주에...>

[P.S.]

#1 홍 장관 퇴임 후, 그의 생전에 어떤 외교관 상가에서 밤 늦게 만났습니다. 당시 현직 외교부 장관이 업무 만찬을 마치고 늦게 문상을 온 후 합석, 세 명이 대화하게 됐습니다. 이 때 홍 전 장관이 일본과의 문제를 포함, 외교부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외교부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너무 청와대에 끌려가는 것 아니냐고 현직 장관에게 크게 화를 내는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측근들과 맞서다가 차관, 장관 자리에서 잇달아 물러난 그만이 할 수 있는 질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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