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은빛’ 기적 쓴 5인조…“아내가 빗자루질 칭찬”

김양희 기자 2024. 4. 1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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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한 인터뷰] 청각장애인 남자컬링 대표팀
청각장애인 컬링 대표팀 스킵 윤순영이 지난 3월 열린 에르주룸겨울데플림픽 남자 단체전에서 경기하는 모습. 한국농아인스포츠연맹 제공

첫 시작은 유도, 태권도 등이었다. 개인 종목을 하다가 단체 종목을 하니까 부딪히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얼음 위에서 그들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그리고 겨울데플림픽(세계청각장애인올림픽) 시상대 위에 섰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갖고도 하나의 목표만 바라본 데 따른 달콤한 결과물이었다. 윤순영(41), 김덕순(41), 정진웅(37), 김민재(36·이상 대한항공), 정재원(46·서울시장애인컬링협회)으로 이뤄진 청각 장애인 컬링 남자 대표팀이 그렇다. 이들은 지난 3월 에르주룸에서 열린 2023 겨울데플림픽(1년 늦게 개막) 남자 컬링 단체전에서 은메달의 쾌거를 이뤄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깜짝 은메달이었다. 김민재는 “겨울데플림픽 컬링 단체전에서 나온 첫 은메달이어서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고 했다.

정진웅(가운데)과 김덕순(오른쪽)이 지난 3월 열린 에르주룸겨울데플림픽 남자 단체전에서 경기하는 모습. 왼쪽은 정재원. 한국농아인스포츠연맹 제공

컬링이라는 종목을 처음 접했을 때는 절대 쉽지 않았다. 현재의 팀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킵 윤순영은 수어 통역사의 도움을 받고 ‘한겨레’와 최근 인터뷰하면서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컬링이라는 단어조차도 생소했다. 주변 권유로 억지로 했는데 6개월 즈음 지나니까 재밌어졌다”고 했다. 유도 선수였던 그는 전국장애인체전 때는 1등을 하다가도 정작 선발전 때는 2등을 해서 매번 태극마크를 놓쳤었다. 그는 에르주룸 대회 때 단체전뿐만 아니라 믹스(혼성) 컬링에서도 김지수(27)와 함께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겨울데플림픽 사상 최초의 은메달이었다.

6년간 이어진 윤순영의 끈질긴 설득으로 컬링을 시작한 정진웅은 “얼음이 미끄러워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면서 “스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시원한 꿀맛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볼링 같기도 하고 게이트볼 같기도 해서 계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덕순은 “윤순영이 처음 권유했을 때 하고는 싶었는데 육아 중이어서 거절했다. 그런데 3년 뒤 즈음 해보니까 스톤을 밀고 앞으로 쭉 밀고 나갈 때 시원하고 바람을 느끼는 게 참 좋았다”고 했다.

김민재 또한 윤순영이 직접 얼음판으로 유혹했다. 김민재는 “태권도를 그만둘 즈음에 (윤)순영이 형이 권유했다. 여름데플림픽에서 태권도로 금메달을 땄으니까 겨울데플림픽에서도 컬링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가 되고 싶었다”면서 “태권도 할 때와 쓰는 근육이 달라서 적응이 오래 걸렸다”고 돌아봤다. 정재원은 “원래 축구를 했었는데 다리를 다쳐서 못 하게 됐다. 처음 컬링을 시작했을 때는 얼음 위에서 자꾸 넘어졌다. 얼음과 친해지려고 엄청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면서 “강원도 팀에 있을 때는 유튜브 등을 통해서 독학해야 했는데 지금은 팀에서 많이 배우고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각 장애인 컬링 남자 대표팀이 지난 3월 열린 에르주룸겨울데플림픽에서 남자 단체 은메달을 딴 뒤 기뻐하는 모습. 왼쪽부터 윤순영, 김진웅, 김덕순, 김민재, 정재원. 한국농아인스포츠연맹 제공

컬링을 하면서 징크스가 생긴 이도 있다. 정진웅은 “컬링 시작하고 2년이 안 됐을 때 경기하다가 브러시가 한 번 부러진 적이 있다. 앞으로 고꾸라져서 그때부터 트라우마가 생겼다”면서 “그래서 지금은 연습 때는 힘을 100% 안 쓰고 살살 한다. 경기 때마다 마음속으로 ‘제발 부러지지 말아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김민재는 “시합 때마다 휴대폰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예선에서 떨어지면 안 되니까”라며 웃었다. 징크스는 아니지만 컬링이라는 운동 종목 특성상 아내가 “걸레질도 잘하겠네” 해서 집안 청소를 더 열심히 하게 된 이(김덕순)도 있다.

이들에게 컬링은 어떤 의미일까. 김덕순은 “기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데플림픽 때 여자 단체에서만 메달을 기대하고 남자 단체는 못 딸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겼다”고 말했다. 유도 선수 시절 2위만 많이 했다는 정진웅은 “컬링은 나의 성공이다. 2위 저주를 깨고 1위로 향하는 성공의 길”이라고 했다. 윤순영은 “반전”이라고 했다. “지고 있어도 역전할 기회가 항상 있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김민재는 “기회”라고 했다. “‘할 수 없다’는 고정 인식을 깨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정재원은 “행운”이라고 했다. “컬링을 시작한 것 자체가 행운인 것 같다. 동료들을 만나 한팀이 되어 새로운 인간관계가 생기고, 역사상 첫 (데플림픽) 은메달을 딴 것도 행운으로 느낀다”고 했다.

윤순영은 “처음 컬링을 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회비를 10만원씩 모아서 훈련하고 그랬다. 2019년부터는 대한장애인컬링협회에서 지원받고 있어서 훈련 환경이 나아졌다”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목표를 가지고 다른 농아인분들도 본인에게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해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했다. 정재원은 “우리도 처음부터 컬링을 잘한 게 아니었다. 진짜 못했다”면서 “모두 다른 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한 곳에 모여서 성적을 내고 있다. 다른 이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김민재 또한 “운동 기회가 오면 꼭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청각장애인 컬링 세계 최고는 중국 팀이다. 이번 겨울데플림픽 결승전 때도 대표팀은 중국에 졌다. 윤순영은 “중국 팀을 상대로는 2017년 세계선수권대회 예선 때 딱 한 번 이겨봤는데 3년 뒤 열리는 겨울데플림픽 때는 꼭 복수하고 시상대 맨 위에 올라가겠다”고 했다. 정재원은 “이번 대회 때 TV 중계가 없어서 가족이나 지인들이 모두 안타까워했다. 올림픽이나 패럴림픽, 데플림픽 모두 똑같이 방송사에서 대우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전날(19일) 서울시청사, 롯데월드타워, 광안대교 등 전국 21개 랜드마크에서 ‘#WeThe15(위더피프틴)’ 보랏빛 점등 행사를 진행한다. 보라색은 글로벌 장애 인식 개선 운동인 ‘위더피프틴'의 테마 컬러이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의미한다. ‘위더피프틴’은 전 세계 15%의 인구, 12억명이 장애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캠페인이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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