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대롱대롱 내가 만든 인형…“내 새끼 같아” [ESC]

한겨레 2024. 4. 1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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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모루인형
지난 3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공방 메리제이스튜디오에서 찍은 모루인형 ‘거울샷’. 모루인형을 만들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것도 유행이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모루인형 키링을 직접 만들 때의 장점은 형체를 만든 다음 취향에 따라 마음껏 꾸밀 수 있다는 거예요. 인형 몸통이 될 모루부터 눈·코·장신구와 볼체인(키링용 군번줄)까지 좋아하는 걸 선택할 수 있죠. 잘하고 못하고가 없을 만큼 쉽고요.”

지난 3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공방 메리제이스튜디오에서 ‘모루인형 키링 만들기’ 수업을 시작하며 박정은(36) 대표가 말했다. ‘선택의 연속’이라던 박 대표의 표현처럼, 내 앞에는 모루가 들어 있는 커다란 상자 1개와 장신구 등이 담긴 작은 상자 4개가 놓여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재료에 내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자, 박 대표는 웃으며 “우선 토끼·강아지·곰·고양이 중 뭘 만들지 고르자”고 했다.

걸그룹 ‘애착템’ 대체재로 대중화

서울 마포구에 있는 공방 메리제이스튜디오의 박정은 대표가 검은 레이스 치마를 입은 곰돌이 모루인형을 보여주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아침에 지하철을 타면 젊은 직장인과 학생들의 배낭·손가방에 북슬북슬 작은 털인형이 대롱대롱 달려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주름 잡힌 레이스 치마를 두르고 ‘라이방’(레이밴) 스타일 선글라스를 낀 토끼부터 왼손엔 병맥주, 오른손엔 백과사전을 든 곰돌이까지. 도무지 비슷한 디자인을 찾기 힘든 이 작고 귀여운 소품의 정체는 ‘모루인형 키링’. 얇은 철사에 털실이 감긴 공예 재료 ‘모루’로 만든 인형 몸통에 다양한 장식을 한 열쇠고리다. 가방뿐 아니라 파우치, 심지어 바지 벨트 고리에 걸어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된다. 온·오프라인 소품가게 등에서 쉽게 살 수 있지만 개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직접 만들기’다.

블루그레이 토끼 모양 모루인형 키링을 매단 숄더백. 박정은 제공

나는 토끼를 선택한 뒤 토끼 형태가 되어줄 모루를 골랐다. 털이 짧고 살짝 곱슬한 ‘복실모루’ 20여색과 털이 길고 직선형인 ‘밍크모루’ 10여색 중 박 대표가 “요즘 특히 인기”라고 귀띔한 블루그레이 색상의 복실모루를 선택했다. 초보자에게는 복실모루가 좋다. 털 길이가 짧아 철사의 형태를 파악하고 조정하기 쉬워서다. 박 대표의 시범에 따라 1m 길이의 모루를 꼬고 구부리니 가로 7㎝, 세로 11㎝의 청회색 토끼가 탄생했다. 튀어나온 털을 가위로 정리했다.

지난 3일 메리제이스튜디오에서 열린 ‘모루인형 키링 만들기’ 하루 수업에서 유해강씨가 모루인형의 코를 붙이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이제 얼굴에 눈과 코를 붙일 차례다. 다양한 사이즈와 색상 중 4㎜짜리 검은색 눈과 분홍색 코를 골라 목공풀로 붙였다. 박 대표는 “의외로 눈·코 위치가 귀여운 느낌을 결정한다.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면 코를 얼굴 중간쯤 높이에, 눈은 살짝 몰리게 붙여봐라. 1㎜ 차이가 크다”고 했다. 어엿한 얼굴을 갖춘 토끼의 귀와 뺨에 산호색 블러셔를 발라주니 생기가 돌았다. 귀에 핫핑크색 군번줄을 달아준 다음 본격적으로 장식품을 골랐다. 니트·치마·바지 등 32벌의 옷 중 박 대표가 리본으로 만든 레이스 치마를 골라 글루건을 사용해 인형에 고정했다. 양쪽 귀에는 보라색 리본을 하나씩 붙여주고 미니 집게도 집었다. 안경이나 고글은 리본과 겹칠 것 같아 생략했다. 손에 드는 장식물은 핸드백부터 각종 맥주·음료수·초콜릿·마술봉 등 최소 30종 이상이었다. 탕후루와 양주 ‘짐빔’을 본드로 양손에 각각 붙였다. 나일론 낚싯줄에 구슬을 꿰어 진주목걸이도 만들었다. 양발에 스케이트보드를 붙여 꾸미기를 마쳤다. 인형 형태를 만드는 데 15분, 꾸미는 데 45분 정도 걸렸다. 인형보다도 장식이 ‘본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끝으로 가게 입구에 마련된 탁자 위 소품 사이 인형을 올려놓고 요즘 엠제트(MZ) 사이에서 유행인 ‘거울 샷’을 찍었다.

모루인형 키링 만들기 유행의 시작은 1년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 초 블랙핑크·뉴진스 등이 ‘애착템’으로 들고 다니던 인형 키링이 주목받으며 열풍이 시작됐다. 그 중심엔 대구 소재 소품숍에서 출발한 브랜드 ‘모남희’의 고양이 캐릭터 키링이 있었다. 5만원 정도의 키링은 품절 사태가 벌어졌고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10만원 선에 거래됐다. 모루인형이 대체재로 뜨기 시작했다. 박 대표는 “모루인형과 모남희 키링이 재료는 다르지만 외관상 비슷하다”며 모루인형 키링을 직접 만들려는 사람들이 생겨난 이유를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모루인형의 가격도 한몫했다. 지난해 7~10월 인터넷 블로그들에는 ‘모남희st(스타일) 모루인형’ 관련 포스팅이 집중적으로 올라왔다. 9년간 공방을 운영한 박 대표가 모루인형 수업을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모루인형은 올해 들어 엠제트 세대 공략을 위한 마케팅에 자주 활용되고 있고, 호응도 뜨겁다. 올해 초 서울 강남구 나이키 익스피리언스 스튜디오에서 열린 ‘나이키 티셔츠를 입은 나만의 모루인형 만들기 체험’은 3월 말까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재료 소진으로 2월 초에 조기 종료됐다. 서울 서초구 종합가전 매장인 ‘삼성 강남’의 오프라인 클래스 ‘컬처랩’은 지난 1~2월 모루인형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했는데 전체 일정이 매진되기도 했다.

“3개 만드는 데 2만5천원…‘내 새끼’ 같아”

삼성 라이온즈의 상징인 청색과 백색을 활용해 만든 모루인형 키링. 권정인 제공

직접 만든 모루인형 키링은 유일무이한 선물이 되기도 한다. 경북 경산에 사는 직장인 권정인(29)씨는 프로야구팀 삼성 라이온즈의 열렬한 팬인 친한 후배에게 줄 생일 선물로 모루인형을 만들었다. “친언니 가방에 달린 모루인형 키링이 너무 귀여웠고, 주변에 만드는 사람도 많아 만들게 됐어요. 후배가 삼성 라이온즈 광팬이라 그걸 테마로 만들었죠.” 첫 도전이었는데 유튜브를 참고했고 모루와 옷·선글라스 등 소품은 온라인에서 구매했다. 구단 상징색인 청색과 백색을 고루 골랐다. “인형 3개를 만드는 데 2만5천원 정도 들었고, 하나 만드는 데 1시간 걸렸어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권씨는 직접 자수를 떠 옷에 팀 로고를 새겨 넣기도 했다. 권씨는 “모루인형 키링 만들기는 일단 쉽다. 판매되는 굿즈는 특별함이 덜한데, 직접 만든 모루인형은 의미도 있고 더 ‘내 새끼’ 같잖나. 선물받은 후배도 너무 좋아하더라”며 뿌듯해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상징인 청색과 백색을 활용해 만든 모루인형 키링. 권정인 제공

손쉽게 모루인형 키링을 만들려면 권씨처럼 영상 콘텐츠를 활용하는 게 좋다. 먼저 유튜브나 틱톡에서 만들고자 하는 모루인형 만들기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모루 1개를 활용하는 초보적인 영상부터 2~3가지 색상의 모루를 사용해 만든 푸바오(판다), 쿠로미(초등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산리오 캐릭터 중 하나) 등 고난도 영상까지 다양하다. 영상은 대개 5~15분 내외로 짧은 편이다. 일단 인형을 만들면 군번줄이나 열쇠고리 훅 등을 달아 키링으로 쓸 수 있다. 인형에 그립톡(휴대전화 거치대나 손잡이로 쓰이는 장식)을 붙여 휴대전화를 장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열쇠고리 훅은 ‘가성비’와 내구성 면에서 다이소 제품이 추천된다.

모루와 재료들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할 수 있다. 네이버쇼핑 기준 모루 가격은 저렴하게는 개당 500원 정도인데, 색상이 그러데이션 되거나 모질이 좋은 제품의 경우 1천~2천원을 넘기도 한다. 부자재의 경우 눈과 코는 100원대지만 옷과 가방 등은 1천원대부터 1만원이 넘는 것까지 차이가 크다. 필요한 재료를 각각 고를 수도 있지만, 무엇을 만들지 모르는 경우 키트를 사도 된다. 인형 1개 키트당 4천~5천원 정도에 판매되고 있다. 모루인형 키링 완제품이 평균 1만5천~2만원에 판매되니 재료를 ‘오버’해서 사지만 않으면 직접 만드는 편이 2배 가까이 저렴하다.

‘모루인형 키링 만들기’ 하루 수업에서 박정은 대표가 귀와 얼굴에 이어 팔을 만드는 등 토끼 모루인형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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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루 성지’ 동대문종합시장

오프라인 매장에선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에 드는 재료를 고를 수 있다. 서울 종로구 동대문종합시장에는 ‘모루 성지’로 불리는 상점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비(B)동 5층에 있는 ‘동대문153’과 맞은편의 ‘하이그린’이 유명하다. 지난 3일 이곳을 찾으니 두 상점에는 10~20대로 보이는 손님 20여명이 북적이며 재료를 고르고 있었다. 모루 가격은 800~1천원대로 온라인 쇼핑몰 최저가보단 비쌌지만 다른 재료 가격은 비슷했다. 전북 군산에 사는 직장인 김서은(28)씨는 핑크·베이지·베이지핑크·화이트 등 파스텔톤 모루 6개와 니트 6개를 ‘동대문153’에서 구입했다. 가격은 총 1만1200원. 고글 4개는 서비스로 받았다. 김씨는 직장 동료 추천으로 지난 3월부터 모루인형 키링을 만들기 시작해 모두 8개를 완성했다. 김씨는 “손을 쓰면 스트레스가 풀려서” 직접 만든다고 했고 “종류가 많아서”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전문가인 박정은 대표는 온라인 쇼핑몰과 동대문종합상가를 모두 이용한다. 박 대표는 “온라인이 확실히 싸지만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동대문에 가고, 당일 재료가 필요할 때도 찾는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동대문종합시장 5층에 있는 ‘하이그린’ 매장. 각종 모루와 재료를 판매하는 곳이다. 유해강 제공

‘하이그린’을 30년간 운영하고 있는 배용국 사장은 지난해 6월부터 모루와 재료를 팔았다. 본격적으로 손님이 늘어난 건 지난해 10~11월부터다. “우리는 트렌드에 맞춰 아이템을 바꾸는데, 인스타그램에서 유행인 걸 확인하고 시작했죠.” 처음에는 니트류 옷이 인기였다. 약 반년이 지난 현재는 흐름이 바뀌었다. “최근에는 우븐 소재(가로세로로 교차하여 짠 직물)로 만든 청치마·티셔츠 등이 잘 팔려요. 카메라·가방·선글라스 등 장식물도요.” 모루 색상은 ‘파스텔톤’이 강세다. “손님은 초등학생부터 40대까지 골고루 있는데, 20~30대는 주로 키링을 만들기 위해 사 가요.” 하루에 400여명이 이곳을 찾아 모루인형 재료를 구매한다고 했다.

모루인형 키링이 유행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먼저 대상과 특별한 정서적 관계를 맺는 ‘애착’이 꼽힌다. 임명호 단국대 교수(심리학)는 “성인이 돼서도 애착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귀여운 인형이 그 대상이 된다. 모루인형은 어릴 적 안고 놀던 곰인형이나 베개가 더 재밌는 형태로 변형된 것으로 이를 통해 정서적 위로를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성을 드러내는 문화의 영향도 있다. 임 교수는 “옛날엔 애착 인형을 숨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자기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인형을 개성껏 꾸밈으로써 ‘나는 이런 걸 즐긴다’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모루인형을 직접 만드는 경우엔 더욱 각별해진다. 임 교수는 “자기가 직접 만든 건 삐뚤빼뚤하고 못나도 훨씬 가치 있게 느껴진다. 완제품을 사는 것보다 애착과 개성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했다.

털실 속에 철사가 감춰진 모루인형은 만들고 달았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잘 휘어지는 철사의 특성 탓에 훼손 가능성이 있어 ‘관리’가 필요하다. 가방에 매달고 다니다가 찌그러지거나 휘는 경우 모양을 바로잡아야 한다. 반면 이러한 ‘단점’을 역이용하면 ‘변신’도 가능하다. 박 대표는 “두발로 서 있는 강아지 인형의 경우 머리를 잡고 몸통을 뒤로 90도 꺾은 뒤, 팔과 다리를 밑으로 접어 내리면 네발로 선 강아지 인형이 된다”고 설명했다. 털에 때가 타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가위로 털끝을 자르거나 비누로 가벼운 물세탁을 할 수도 있는데, 그 정도로 해결이 안 되면 새로 만드는 걸 추천한다”고 박 대표는 말했다.

유해강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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