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한국 SF’ 그런 게 있어?…그리고 30년이 흘렀다

한겨레 2024. 4.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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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책 │ 듀나 작가
작은 세계였던 한국 SF계…PC통신 하이텔 올린 단편들
작가 계속할지 몰랐던 시절 “잡탕…그저 재밌게 놀았다”
올해 데뷔 30년을 맞은 SF 작가 듀나는 ‘얼굴 없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듀나를 상징하는 토끼 캐릭터 ‘듀나벨’. 듀나 제공

나는 단편작가이기 때문에 첫 책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지저분하다. 정리하기가 좀 고약한데, 나의 ‘첫 책’은 세 권, 네 권, 심지어 다섯 권이 될 수도 있다.

최대한 깔끔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1994년부터 하이텔 과학소설동호회 창작게시판에 단편들을 올리면서 창작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같은 곳에 단편들을 올리는 회원들과 함께 ‘사이버펑크’라는 공동단편집을 발표했다. 이게 내 이름이 실린 첫 번째 책이다. 그러나 나중에 내 단편들만 모아 ‘나비전쟁’이라는 책을 냈고 이게 내 첫 번째 단독 단편집이다. 그리고 나중에 ‘나비전쟁’에 실린 단편 몇몇이 뒤에 나온 ‘면세구역’과 ‘태평양 횡단특급’에 실렸다. 그리고 내 30주년을 기념해 그때 누락되었던 ‘나비전쟁’ 단편들 나머지와 기타 등등의 단편이 실린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가 나왔다. 한마디로 말해 이 책들을 분리하는 건 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이들은 모두 다양한 의미로 내 ‘첫 책’들이다. 그래도 공식적인 내 첫 책을 뽑으라면 역시 ‘나비전쟁’을 꺼내야겠지만.

‘나비전쟁’은 투박하고 두툼한 책이다. 당시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당시 내가 진지한 에스에프(SF) 작가인지도 알 수 없었고 이 경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나비전쟁’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 단편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있나. 그 때까지 쓴 거 대부분을 그냥 쏟아부어야지.

그 결과물은 어쩔 수 없이 잡탕이다. 일단 내가 이 일을 시작한 30년 전은 지금과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지금은 한국 에스에프의 계보가 형성되어 그 안에서 작품이 읽히며, 작가 수도 늘었고, 독자들의 기대치도 높으며 정식으로 데뷔할 수 있는 통로도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첫 작품을 내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적어도 이 직업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하지만 내가 이 일을 시작할 때에는 아마추어 한 명이 통신망 게시판에 농담조의 짧은 엽편을 올려도 그게 ‘한국 에스에프계’에서 제법 중요한 사건일 수 있었던 때였다. 그 ‘한국 에스에프계’는 그렇게 작은 세계였다.

듀나 데뷔 30년을 맞아 초기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의 표지.

당연히 나는 퀄리티나 글의 무게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을 그냥 했고, 나의 가장 큰 목표는 내가 그동안 읽었던 에스에프 단편들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 무언가는 프레더릭 브라운의 1페이지짜리 짧은 농담조 엽편일 수도 있고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운 단편일 수도 있었다. 나는 쉬운 것부터 하기로 생각했다. 어차피 팁트리 주니어를 모방하는 건 당시 나에게 좀 벅차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온갖 잡동사니들을 모두 단편집에 실었다. ‘면세구역’과 ‘태평양 횡단특급’은 그 뒤에 내가 좀 정신을 차린 뒤 나름 자부심을 갖고 만든 책들로 이들의 구성은 비교적 멀쩡하다. 당연히 이 책들에 실린 ‘나비전쟁’ 단편들은 ‘나비전쟁’에 들어 있을 때보다 훨씬 나은 작품처럼 보인다. 책의 구성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이 잡다한 난장판이 엄청나게 부끄럽거나 그렇지 않다. 그건 그 당시엔 나름 최선이었고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 지금 읽어도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재미가 있는데,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글이 어떻게 낡았는지가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단편들이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에 수록될 때는 조금 손을 보았다. 과거를 너무 심하게 조작하면 안 되지만 그래도 지금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 하니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취미였던 에스에프 쓰기는 마감에 쫓겨 하는 힘겨운 일이 됐다. 과거를 미화할 생각도 없고 그때로 돌아갈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어떤 대가도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글을 쓰던 당시의 내가 종종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작가

그리고 다음 책들

듀나 SF 소설
아직은 신이 아니야 이 책을 낸 2013년은 내가 일년에 몇 편씩 쏟아지는 마블 유니버스 영화에 조금씩 지쳐가던 때였다. 그래서 나름 비판적인 태도로 이 장르를 보는 책을 쓰면 어떨까 생각했다. 내가 이 책에서 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슈퍼히어로 공식을 뒤집은 것이었다. 초능력이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생기고, 세계는 슈퍼 영웅에 의해 지켜지는 대신 돌이킬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면? 재미있는 역사가 나올 것 같았다.
창비(2013)
너네 아빠 어딨니 원래는 ‘용의 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작품집이다. ‘아직은 신이 아니야’는 내 공식적인 첫 청소년책이지만, 이 책도 꽤 청소년책에 근접했다. 청소년 주인공들이 대부분이고 내가 청소년책에서 보고 좋아했던 것과 같은 모험들이 나왔다. 단지 폭력과 설정의 강도를 높였는데, 그렇다고 이 책의 청소년책스러움이 사라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상상력이 가장 폭력적이었던 때도 그 시기였으니까.
북스피어(2007, 2024)
듀나 SF 소설
제저벨 오랫동안 내 지식의 상당수는 실제 책보다는 책에 대한 책과 리스트에서 나왔다. 나는 내가 본 적이 없는 영화들과 책을 소개하는 책들을 잔뜩 갖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부족해서 종종 나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들과 책을 담은 가짜 리스트를 만들곤 했다. 그 때문에 오로지 간접지식을 통해 접한 옛 세계의 모방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상상하는 건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책의 무대 크루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자음과모음(2012), 네오픽션(2022), 읻다(2023)
평형추 동명의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한 책이다. 언제나 우주 엘리베이터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문제는 우주 엘리베이터로 책을 쓰는 건 그냥 엘리베이터에 대한 책을 쓰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주 엘리베이터보다는 우주 엘리베이터를 둘러싼 음모에 대한 탐정물을 쓰는 게 더 쉬울 거 같았다. 배경이 되는 파투산섬은 당연히 조지프 콘래드의 ‘로드 짐’에서 빌려왔는데, 나는 이전부터 콘래드가 만든 가상 국가들을 좋아했었다. 내 다음 소설에서도 콘래드의 가짜 나라 두 곳이 잠시 배경으로 등장한다.
알마(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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