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의쉼표] 기억은 어디로 가는가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을 뒤지다가 흰 종이로 싸인 얇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책을 아예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었다.
한 줄 읽고 후배의 얼굴을, 다시 한 줄 읽고 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저 까마득한 어느 날 후배와 마주 앉았던 밥집에 가 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시집을 펼친다. 깊은 밤이고 사방이 고요하고 정신도 맑지만 나는 시에 집중하지 못한다. 한 줄 읽고 후배의 얼굴을, 다시 한 줄 읽고 그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페이지를 넘긴다. 팔인용 방. 제목을 보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저 까마득한 어느 날 후배와 마주 앉았던 밥집에 가 있다. 누나, 내가 어제 고시원에 방 보러 갔었는데 말이야. 보통 고시원은 다 일인실이잖아. 근데 어제 총무가 보여준 방은 글쎄 팔인실인 거야. 이층 침대가 네 개 있는데 거기 일곱 명이 누워 있더라고. 문이 열리자마자 그 일곱 명이 나를 노려보는데…… 어휴, 나 그거 시로 쓸 거야. 후배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시를 읊조린다. 나는 괜한 참견을 한다. 일곱 명이 나를 본다, 말고 열네 개의 눈동자가 나를 본다, 이게 낫지 않을까? 후배가 웃는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텐데. 아니, 어서 밥부터 먹으라고 할 텐데.
후배가 떠난 지 이십 년이 되어간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 그와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어쨌든 생전에 절친하지도 않았고 그가 떠난 후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에 대한 기억은 이토록 크고 깊고 가까워 나를 아프게 한다. 사람은 얼마만큼의 기억을 품을 수 있는가. 그것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되는가.
문득 후배는 어떤 기억을 품고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세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자신에 대해. 일생 동안 그가 품었던 기억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내가 품고 있는 기억은 어디로 갈까, 내가 죽으면. 셰익스피어는 물었다.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Where goes the white when the snow melts? 이 서글프고도 아름다운 문장이 실제 셰익스피어의 것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후배가 그립고 미안하고 추운 밤, 나는 흰 종이에 싸인 책을 도로 서랍에 넣는다.
김미월 소설가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정통한 소식통에 들었다”던 박지원…이재명 파기환송에 “예상외 판결”
- "(뉴진스) 계약은 장난이 아니다" 레전드 프로듀서의 일침
- ‘야구선수 출신’ 아빠 야구방망이에 온몸 멍든 채 숨진 11살
- “이것들 봐라? 한 달만 기다려라” 민주당 ‘보복’ 예고?…하루도 안 넘기고 심우정 총장 탄핵
- '도난 피해' 박나래, 결국 눈물 쏟았다…김지연 "한결같이 잘해준 유일한 분"
- 백종원 “이제 다 바꾸겠습니다”…50억 쏟아부은 이유
- 일부러 챙겨 먹었는데…1급 발암물질 검출된 건강식품 대명사
- “왜 죽었지” 오열하던 남편…신혼 아내 살해한 범인이었다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