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십 년째 오는 봄비

기자 2024. 4. 1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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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신비한 물질이다. 저 창공에 얼마나 깊은 우물이 있어 이 포근한 공중에서 느닷없이 물이 떨어지는가. 비가 와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 놀랍기도 하다. 비는 누구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온다. 사물을 적실 뿐 아니라 사람을 촉촉하게 만든다. 우수 지나 곡우 근처, 이즈음에는 물이 많이 필요하다. 비는 와야 하는 것. 비가 온다. 놀라움이 오고 있다.

봄비 내린다. 비는 하늘에서 온다. 비에는 많은 성분이 들어 있다. 비는 천하에 골고루 내리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안긴다. 오늘 오는 비는 그야말로 십 년째 매해 오는 비. 사월에 찾아오는 비는 하늘이 흘리는 눈물 같다. 비에는 비밀이 있다. 공중에도 비밀이 많다. 낮말은 새가 다 들었으니깐. 지상의 비밀을 누설하러 비가 내린다.

저 슬픔의 비가 사월의 달력을 적신다. 올해도 하늘은 그 뜻을 알고 때맞추어 비를 정확하게 보내주셨다. 긴 가뭄 끝에 도착한 소식. 저곳의 기미를 전해주는 물방울 편지. 그곳 근황을 일필휘지로 적는 빗줄기. 누군가의 지문이 진하게 찍혀 있을 것만 같은 빗방울. 할 수만 있다면 코를 거꾸로 뒤집어서라도 몇 모금 직방으로 들이켜고 싶을 만큼 고마운 단비. 비는 기억의 물이다.

봄비가 시절을 알고 사무치게 내리고 있다. 사월의 비는 거기와 여기를 잇는 끈적한 밧줄 같다. 실제로 우리말 ‘봄비’에는 두 개의 사다리가 나란히 있다. 지금 꼿꼿하게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는 사람들. 바위처럼 단단한 미음 받침을 딛고, 저 비읍 사다리 타고 훌쩍 하늘로 오르고 싶다.

가느다란 봄비는 나무를 더욱 단호하게 세우고, 우리 사는 세상도 바꿀 태세다. 나무들은 지난가을에 이미 시범을 보인 바이기도 하다. 투표하듯 잎을 일제히 떨구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뒤 이런 싱그러운 숲의 녹음을 이룩한 것이다.

이윽고 밤이 오자 별이 오랜 친구처럼 알맞은 거리에서 신호를 한다. 별을 바라본다. 별은 지구에 와서 빛난다. 바다에서 올라간 성분도 별에는 있을 것이다. 달도 너의 눈에서 비로소 작아진다. 어둠 속에서 별은 살아남은 자들의 간절한 눈빛으로 별자리가 된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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