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마스터스의 긴 여운 속에 어른거리는 클리포드 로버츠

방민준 2024. 4. 1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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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골프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 토너먼트를 직접 보기 위해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을 찾은 수많은 갤러리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지구촌 별들의 골프 제전인 제88회 마스터스가 압도적인 경기를 펼친 스카티 셰플러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으나 그 여운은 쉬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어렵게 출전권을 확보한 선수들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로 혼신을 다했으나 상당수는 컷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굴욕을 맛봤다. 선두권에서 우승 경쟁을 벌이던 강력한 후보들도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코스가 숨기고 있는 발톱의 희생자가 되었다.



 



마스터스의 드높은 명성은 어쩌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골프 코스에 감춰진 함정 탓인지도 모른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마스터스의 명성은 멋진 대회 개최를 구상한 '구성(球聖)' 보비 존스(Robert Tyre Jones Jr. 1902~1971)보다는 골프 코스 건설과 대회 진행을 총지휘한 클리포드 로버츠(Clifford Roberts, 1894~1977)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리포드 로버츠가 없었다면, 오늘의 마스터스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마스터스의 탄생에 그의 역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1930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 28세에 은퇴한 '영원한 아마추어' 보비 존스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골프 코스를 만들어 멋진 대회를 개최하는 꿈을 실현하고 싶어 했으나 실현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럴 즈음 보비 존스 앞에 클리포드 로버츠라는 구원자가 나타났다. 어릴 때 부모가 자살하고 중학교 3학년 때 학업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불우한 청소년 시절을 보낸 그는 뉴욕에서 주식에 눈을 뜨면서 주식 브로커로 변신, 30세쯤에 큰돈을 벌었다.



 



로버츠는 1931년 뉴욕을 방문한 보비 존스를 만나 그의 골프장 건설 및 대회 개최 의지를 확인한 뒤 동업을 제안했다. 그는 존스의 명성을 앞세워 투자자를 모으면 크게 성공할 것으로 확신했다. 성장 배경과 성격이 판이한 두 사람은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을 공동 창업했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는 1933년 완성됐지만 난관이 많았다. 골프장부지 45만 평을 사들여 최고의 골프장을 건설, 부자들에게 회원권을 팔아 건설 비용을 대겠다는 로버츠의 계획은 대공황으로 차질이 생겼다. 1,800명의 멤버를 모집할 계획이었지만 100명도 채우지 못해 파산 위기를 맞았고 코스 주변 주택 분양도 저조했다. 로버츠는 골프장 홍보를 위해 US오픈을 유치하려 했지만 미국골프협회(USGA)로부터 거절당했다.



 



자체 대회를 개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1934년 제1회 대회를 '오거스타 내셔널 인비테이셔널'로 정하고 초청장을 보냈다. 유명선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보비 존스도 출전했다. 1회 대회는 대성공이었다. 대회 후 새로운 멤버가 속속 들어왔고 입회비로 채권자들의 이자를 갚을 수 있었다. 미디어도 US오픈보다 좋은 대회라고 호평했다. 미래를 확신한 로버츠는 1939년부터 공식 명칭을 '마스터스 토너먼트'로 바꾸고 지구촌 최고의 골프 코스와 대회를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혁신에 착수한다. 



 



창립대회 때부터 대회장이 되어 모든 것을 챙긴 그는 '마스터스에서는 무엇이든 완벽하고 최고여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3, 4 라운드를 3일째 끝내던 것을 4라운드를 4일에 걸쳐 열도록 하고, 2인 1조 플레이를 처음 도입했다. 갤러리들이 선수들의 스코어를 알 수 있도록 코스에 리더보드를 처음 설치하고 갤러리를 위한 스탠드와 대형 주차장을 마련하는가 하면 최초로 전국에 라디오로 생중계했다. 



 



로버츠 덕분에 마스터스는 많은 선수와 기자들이 초청장을 받고 싶어 하는 대회로 바뀌었다. 



 



자신감을 얻는 로버츠는 자기만의 엄격한 기준으로 선수와 기자를 초청하는가 하면 마스터스에 불만을 갖거나 비우호적인 선수와 기자들을 초청에서 제외했다. TV 중계방송에서 적합하지 않은 용어를 쓴 해설자가 퇴출되는가 하면 방송중계의 광고 시간도 제한했다. 그의 허락이 없이는 손바닥만 한 잔디도 제거할 수 없고, 그린을 깎을 때도 반드시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그는 '마스터스의 대통령'이라고 불렸다. 그는 1948년 아이젠하워 장군을 멤버로 초대해 함께 골프를 치며 친분을 쌓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선거운동과 자금지원을 하고 백악관을 자유롭게 출입했다. 보비 존스가 마스터스를 창설했지만 커튼 뒤에 숨어있고 로버트가 진두지휘하는 모양이었다.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그는 여론의 압력에 세상을 떠나기 전에야 흑인 골퍼 로버트 리 엘더(1934~2021)라는 흑인 선수를 1975년 마스터스에 초청했다.



 



1976년 82세로 43년 동안 머물렀던 마스터스 대회 회장에서 물러난 그는 치유가 어려운 암 판정을 받고 파3 코스의 8번 홀 연못가에서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무덤을 남기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 가루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 뿌려졌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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