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칼럼] 과학계 명예회복이 예산증액보다 시급하다

2024. 4. 1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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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통령실이 총선을 앞두고 바쁘게 움직였다. 지난 3일에는 내년도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역대 최고 수준'으로 편성하겠다고 밝혔다. 작년에 '카르텔'(떼도둑)로 내몰려 14.7%의 예산을 삭감당했던 과학자들에게는 뜬금없는 일이었다. 이어 8일에는 AI·첨단바이오·양자과학기술에 대한 큰 그림을 담은 '3대 이니셔티브'를 대통령이 이달 중에 직접 발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2030년까지 'G3 과학기술 강국 도약'이 목표라고 한다.

그런데 총선이 여당의 참패로 끝나버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로 치열한 기술 패권 시대에 대응하겠다는 대통령의 뒤늦은 반전(反轉)의 약속이 기대만큼 빛을 내지 못했던 셈이다. 오히려 고작 4조6000억 원의 예산 절약을 위해 선진국 진입의 주역이었던 과학자를 '떼도둑'으로 매도해 버리고, 비현실적인 의대 2000명 증원을 밀어붙이겠다고 코로나19 팬데믹 극복에 헌신했던 의사를 '악마'로 내몰아 버린 것이 최악의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상황이 만만치 않다. 총선이 끝난 후에야 공개한 지난해 정부의 재정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작년에 기록한 재정적자가 무려 87조 원이나 됐다는 것이다. 세수가 56조 원이나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한다. 국가채무도 역대 최대치인 1127조 원으로 늘어났다. 2019년까지 30%대였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기록적인 50.4%가 돼버렸다.

올해 상황도 암울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스라엘·하마스·이란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원유 가격이 치솟고, 환율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반도체·배터리 전쟁도 부담스럽다. 국제사회에 약속한 탄소중립 의무도 만만치 않다. 엎친 데 덮친다고 총선을 통해 다시 국회를 틀어쥔 거대 야당이 망국적인 탈원전과 신재생 확대를 요구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정부가 총선을 앞두고 자초한 재정 수요가 엄청나다. 지난 두 달 동안 보건복지부의 비현실적 의료 개혁에 쏟아부은 예산이 무려 5049억 원이나 된다. 부산대 병원 건설을 위해 약속한 예산도 7000억 원이다. 그뿐이 아니다. 대통령이 24차례의 민생토론회에서 약속한 240개 과제에 투입해야 하는 비용도 1000조 원에 이른다. 연구개발 예산을 역대 최고 수준으로 증액하겠다는 약속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약(空約)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정부 예산에 숨겨져 있다는 2조8000억 원의 '모호한 연구개발 예산'을 찾아내는 수준의 꼼수는 의미가 없다. 산학연의 벽을 허물어서 분절적 연구개발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주장도 이제는 설득력을 잃어버린 '철 지난 유행가'다. 연구개발 기반도 마련하지 못한 AI, 산업화 가능성도 분명치 않은 양자기술에 대한 어설픈 기대로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 이유가 없다.

의료 개혁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전문성이 부족한 보건복지부에게 미국 국방성의 연구관리 기법을 어설프게 흉내 낸 한국형 ARPA-H를 강요하는 첨단바이오 투자의 성공도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실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물론 연구개발 예산을 충분히 확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억지로 추락시켜 버린 과학계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존심과 명예를 먹고 사는 과학자를 무차별적으로 '떼도둑'과 '악마'로 내몰아 버린 것은 대통령의 돌이키기 어려운 실수였다. '역사에 남는 과학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무시하고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관련자를 확실하게 찾아내서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

'뼛속까지 문송'일 수밖에 없는 대통령의 이중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화려한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 운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아채지 못한 것은 과학기술계의 안타까운 실수였다. 이제 대통령의 과학기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에 대한 비현실적인 집착은 버릴 수밖에 없다.

예산 증액을 핑계로 또 연구개발 사업을 뒤흔들고,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의대 증원을 '과학적'이라고 우기는 과학기술부·보건복지부·교육부의 억지를 바로잡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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