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고 차별 말라"...'똘레랑스 지식인' 홍세화씨 별세

조태성 2024. 4. 1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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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 지식인'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18일 서울 중랑구 사가정로 녹색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고인은 지난해 2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1947년 서울 태생인 고인은 경기중, 경기고를 거쳐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다.

남민전 사건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없게 된 고인은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 현지에서 관광안내원, 택시 운전사, 무역 중개업 등을 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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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장발장은행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똘레랑스 지식인'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18일 서울 중랑구 사가정로 녹색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고인은 지난해 2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향년 77세.

1947년 서울 태생인 고인은 경기중, 경기고를 거쳐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전쟁 당시 집안이 풍비박산 난 사연을 알게 되면서 방황하다 자퇴한 뒤 1969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재입학했다. 이후 학생운동에 몰두해 한 차례 제적을 당한 끝에 1977년 졸업했다. 졸업 뒤엔 무역회사에 취직해 유럽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났다. 앞서 박정희 정권은 1974년 혹독한 고문 끝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 1975년 4월 대법원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8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는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남민전은 이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친 조직이었다. 고인 또한 사법살인을 두고 "그들은 나일 수 있고 내가 그들일 수 있었다. 그들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일 수 있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남민전 사건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없게 된 고인은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 현지에서 관광안내원, 택시 운전사, 무역 중개업 등을 하며 살았다. 옛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뒤 주변의 권유에 따라 1995년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출간했는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고인은 이 책에서 다름을 이유로 억압이나 배제나 차별을 하지 말라는 '똘레랑스(관용)' 개념을 강조했고, 이후 똘레랑스는 한국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 책은 한 차례 개정을 거쳐 지금까지 50만 부 가까이 팔렸다.

1999년 두 번째 책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내고 20년 만에 한국을 찾았던 고인은 곧 영구 귀국했다. 이후 한겨레신문 등에서 언론인으로, 또 진보신당 등에서 정치인으로 살았다. 최근에는 노동당 후원회장 겸 고문직을 맡았다. '소박한 자유인'을 자처하며 늘 조금 더 왼쪽에 위치하려 했다. 벌금형을 받았으나 벌금조차 내지 못해 노역형을 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2015년 장발장은행을 설립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일선씨와 자녀 수현·용빈씨가 있다. 장례는 한겨레신문사 사우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19일부터 조문 가능하고 발인은 21일 오전 8시. (02) 2227-7500.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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