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생명력은 ‘유연한 변화’… 尹, 아집·불통의 국정 스타일 버려야[Deep Read]

2024. 4. 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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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우의 Deep Read - 보수의 혁신
위기에 처한 한국 보수정치… ‘인간의 불완전성’ 인정하고 이념·정책적 유연성 발휘해야
현실과 부단히 소통·통합해온 英보수당 귀감… 尹, 대화·타협의 시대적 요구 수용 자세 절실

22대 총선 결과는 한국의 보수정치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출범 2년 만에 혹독한 민심의 회초리를 맞은 윤석열 대통령과 여권은 막중한 쇄신 과제를 떠안게 됐다. 보수는 어떻게, 그리고 왜 혁신돼야 하나.

◇보수주의란

2016년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거의 궤멸 수준에 이르렀던 보수정치는 문재인 정부(2017~2022년)의 실정 덕분에 5년 만에 집권하면서 재건의 기회를 맞았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따른 반사이익의 결과였다. 윤 정부는 보수의 정체성을 스스로 파괴했던 박근혜 정부의 실패를 소중한 경험으로 삼아야 했다.

여당 참패의 책임을 윤 대통령의 오만과 불통이라는 국정 운영 스타일에서 찾는 것은 맞는다. 윤 대통령의 권위주의는 여전하고 여당은 대통령을 견제하지 못했다. 친윤과 비윤을 갈라치기 하면서 당내 권력투쟁에 매몰된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품격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원칙도 없고 능력도 없는 보수라는 평가를 자초한 것이다.

정당에서 중심 가치관이 올바로 설정되거나 작동하지 못하면 집단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게 된다. 집권 국민의힘은 보수정치가 지켜야 할 중심가치를 경시함으로써 선거 참패라는 결과를 불렀다. 이에 보수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수의 가치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보수란 무엇이고,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혁신하고 바뀌어야 하는가.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가 무엇이냐를 물었을 때 선뜻 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보수주의가 이념적 완결성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보수주의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에 따르면 보수주의란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면서 사회적 변화 요구에 신중하게 대응하는 태도’ 정도로 묘사된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보수주의란 급속한 변화를 저지하는 지향성을 갖지만, 변화와 쇄신을 거부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보수주의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정치권력에 대한 헌법적 제약, 정치적 견제와 균형, 법률의 적절한 강제, 그리고 욕구를 억누르는 미묘한 그물망을 도구로 용인해야 하는 이유이다. 윤 대통령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영국 보수당 사례

보수주의가 제대로 작동한 사례로 영국의 보수당을 들 수 있다. 보수당이 노동당보다 훨씬 오랜 기간 영국 정치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로 보수의 ‘유연성’을 꼽게 된다. 변화의 요구가 강력할 때는 적극적으로 개혁에 나섬으로써 개혁 이슈를 선점했다. 보수당은 190년간 당명을 바꾸지 않고 존속하는 세계 최장수 정당이다. 한국의 보수당은 본질적 변화 없이 9번이나 당명이 바뀌었다.

국민을 분열이 아니라 통합의 장으로 이끈 인물이 ‘보수당의 아버지’로 불리는 1870년대 벤저민 디즈레일리다. 그는 ‘일국 보수주의’(One Nation Conservatism)를 내세워 이념과 지지세력을 넘어 통합의 정치를 제시했다. 스탠리 볼드윈은 남녀동등 선거권, 사회연금제도 도입이라는 개혁적 신보수주의 슬로건으로 노동당에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아온다.

1945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1951년 재기한 윈스턴 처칠의 선거전략과 1979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의 정책은 상호 대비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처칠은 산업 분야의 국가 개입 인정,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노사 협력, 국민의료보험 시행 등으로 복지국가를 수용했다. 대처는 시장경제원칙을 철저히 따랐고 법·질서·도덕을 강조하는 정책을 기반으로 경제 성장을 회복시켰다. 이처럼 같은 보수더라도 시대별로 직면한 국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수립에 이념적 유연성을 발휘했다.

박지향 교수는 ‘정당의 생명력: 영국 보수당’에서 보수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정리했다. ①선거 실패 후 신속한 재정비에 나서는 결속 ②이념·정책적 유연성과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처 ③국정능력에 적합한 정당 이미지 구축 ④계급과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는 이미지 ⑤정당 조직력과 캠페인 능력.

강원택 교수는 ‘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에서 영국 보수당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한 현실과 타협하는 유연성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념적 틀에 묶이지 않고 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정체성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통찰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의 보수당은 노동계급과 중도층을 대상으로 당의 외연을 넓혀왔다.

◇尹의 변화가 7할

윤석열 대통령과 여권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첫째, 포용력 있는 통합의 보수, 따뜻한 보수의 진면모를 보여야 한다. 기존 질서와 가치에만 매달리는 수동성을 벗어나 사회적 변화에 맞는 실체적 가치를 실천하려는 전략적 능동성을 택해야 한다. 보수주의의 철학적 빈곤과 가치의 기갈로부터 벗어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와 시대적 요구에 과감히 포기할 원칙이 무엇인지 깨달아 부단히 혁신과 쇄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보수의 가치를 승계한 젊은 정치인 충원을 위한 시공간 마련도 중요하다. 이번 총선에서 새로 유권자의 선택을 받은 국민의힘 당선자 중 보좌진 경험이 있는 인사는 2명에 불과했다. 정당 내부에서, 즉 광의의 ‘정치학교’에서 젊은 정치인을 훈련·양성·배출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영국의 보수당은 청년보수당(YC·Young Conservatives)이라는 정치학교를 운영하며 청년정치인들에게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전문정치인으로 육성한다. 대처·존 메이저·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모두 학생 때 YC에서 활동한 경험을 밑거름으로 전문정치인이 됐다(박지향 ‘정당의 생명력’).

총선 참패를 맛본 여권의 가장 큰 위기는 윤 대통령에게 있다. 대선 승리를 이끈 선거동맹을 깨트려 지지 기반을 축소했고, ‘김건희 명품백·이종섭 사태·황상무 사건·물가 논란·의료 대란’ 등 선거 막판 악재가 몽땅 ‘윤석열발(發)’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화는 오만함을 겸손함으로, 불통을 소통으로, 고집을 유연함으로 바꾸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 현시점 대한민국 보수정치가 혁신하기 위한 책임의 7할은 윤 대통령에게 있다. 국민의힘의 쇄신이 나머지 3할이다.

◇보수의 덕목

보수주의는 경쟁 속에는 보완된다. 보수의 정책 결정 과정에 내부적 논쟁과 갈등이 치열하게 부딪히고 경쟁하는 가운데 소통과 타협의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 윤 대통령과 여권이 성찰해야 할 대목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전 한국선거학회 회장

■ 용어 설명

‘정치학교’란 젊은 세대가 정치적 덕목을 훈련·검증받고 성과를 내도록 하는 광의의 조직·기관 등을 말함. 정당의 체계화한 훈련 프로그램, 비서, 보좌진, 자치단체와 의회 경험 등이 포함됨.

‘일국 보수주의’는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이끌던 영국의 보수당에서 탄생한 개념. 고전적 보수주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노동·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며 사회경제적으로 개혁적 성향을 보임.

■ 세줄 요약

보수주의란 : 에드먼드 버크에 따르면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면서 사회적 변화 요구에 신중하게 대응하는 태도’임. 급격한 변화를 저지하려고 하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 변화와 쇄신을 받아들이는 것.

영국 보수당 사례 : 영국 보수당이 세계 최장수 정당으로 존속하며 영국 정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념적·정책적 ‘유연성’에 있음. 이념적 틀에 묶이지 않고 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정체성이 중요.

尹의 변화가 7할 : 여권 위기의 근원은 윤석열 대통령. 오만함을 겸손함으로, 불통을 소통으로, 고집을 유연함으로 바꿔야. 대한민국 보수정치 혁신을 위한 책임의 7할은 윤 대통령에게, 3할의 책임은 국민의힘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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