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천국’ 미국서도…법원 “대주주에 주식보상 안돼”

박종오 기자 2024. 4. 18.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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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나스닥거래소의 전자화면에 애플 주가가 표시돼 있다. REUTERS

주식시장에 상장된 프랜차이즈 기업 ‘맛나치킨’(가상의 기업)의 지분 10%를 보유한 주주 길동이는 그를 대신해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진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 월급만 따박따박 받고 주가 관리엔 영 소극적인 것 같아서다. 고민 끝에 길동이는 다른 주주들과 이사진을 설득해 경영진 급여를 ‘현금’ 대신 ‘주식’으로 주기로 했다. 경영진이 주가를 높이는 데 바짝 신경 쓰도록 당근을 제시한 셈이다.

문제는 맛나치킨 지분 30%를 보유하고 회사 경영에도 참여하는 영길이 자기도 앞으로 성과급을 회사 주식으로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맛나치킨의 성장을 위해선 영길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까?

국내 재계는 “그렇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대주주인 영길에게 지급한 주식 보상 내역을 투자자들에게 알리는 제도를 “기업의 부담”이라고 여긴다. 지난 16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그룹 총수 일가가 받는 ‘양도제한 조건부 주식’(RSU,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공짜로 주는 주식) 현황을 반드시 공시하라고 밝히자, 한국경제인협회(옛 전경련)는 “금융감독원 공시와 중복돼 이해 관계자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기업의 부담만 가중시킨다”며 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에프케이아이(FKI)타워 앞 한국경제인협회 표지석.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러나 기업 관련 법률과 자본시장 선진국인 미국 법원의 판단은 다르다. 미국 델라웨어주 법원이 대표적이다. 델라웨어주는 회사법과 세법 등이 모두 ‘친기업’ 성향인 까닭에 인구 수보다 지역에 등록된 법인 수가 더 많은 ‘기업 천국’으로 불린다. 애플·아마존·구글 모기업인 알파벳 등 초거대 기업은 물론, 쿠팡·현대차·롯데·네이버 등 국내 대기업들도 현지 법인 본사를 이곳에 둔다. 이런 까닭에 델라웨어주의 회사법과 판례는 세계적인 권위를 갖는다.

델라웨어주 법원은 지난 1월 “테슬라 이사회가 2018년 1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에게 성과급으로 최대 558억달러(약 77조원) 규모 스톡옵션(미리 정한 가격에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을 지급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한 것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테슬라 주식 9주를 보유한 소액주주 리처드 토네타가 제기한 소송에서 토네타 손을 들어준 것이다.

연합뉴스

한겨레가 이 판결문 200장을 분석해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델라웨어주 법원은 재판에서 “테슬라 이사회가 회사를 위한 ‘충실 의무’를 어기고 불공정한 성과급 지급을 결정했다”고 판단했다. 핵심 근거는 2가지다.

먼저 재판부는 “주식 보상은 ‘대리인 비용’(주주와 경영자의 이해관계가 달라 발생하는 비용)을 줄이고 경영진과 주주의 이익과 일치시키는 강력한 방법”이라면서도 “그러나 경영진이 상당한 규모의 지분을 이미 보유한 경우 경영진의 이익이 주주 이익과 이미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머스크가 당시 테슬라 지분 21.9%를 보유한 ‘지배주주’ 겸 경영자로서, 주가가 오르면 자신도 막대한 이익을 얻는 유인(인센티브) 구조가 이미 존재하는 만큼 별도 성과급으로 주식을 보태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판결문은 머스크와 달리, 대주주 경영자들이 주식 보상을 포기한 사례로 마크 저커버그(메타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창업자),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 창업자) 등을 꼽았다.

이는 국내 대기업과 일부 증권사 등이 성과급·상여 명목 등으로 회사 주식(자사주)을 총수 일가에게 나눠주는 현실과 뚜렷하게 대조적이다. 특히 재판부는 “델라웨어주 법은 기업 지배주주와의 거래에 내재된 고유한 위험을 인정하고 있다”며 “지배주주와의 거래를 검토하는 기준은 ‘공정성’”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으로 치면 총수 일가인 경영진이 주주 및 회사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포함한 임원 보수를 공정하게 결정해야 하는 ‘충실 의무’가 있다는 의미다.

델라웨어주 법원은 주식 보상 결정 ‘과정’도 문제 삼았다. 지배주주인 머스크가 이사회의 의사 결정에 영향력을 끼치고, 머스크와 개인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맺은 이사진들도 대주주에게 지급하는 성과 보수의 적정성을 ‘협상’한 게 아니라 머스크에게 ‘협력’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대주주가 자기 성과급을 직접 결정한 ‘셀프 보상’에 가깝다는 얘기다. 테슬라 쪽은 이 같은 이사들의 잠재적 ‘이해 상충’을 주주들에게 공시하지도 않았다. 재판부는 “이는 공시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처럼 총수 일가의 주식 보상 내역만 단순 공시하는 게 아니라, 보상 결정의 구체적인 근거와 이사들의 독립성 여부 등을 주주들에게 상세히 공개해야 한다는 뜻이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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