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대신 교수님 집 찾아가요"… 의료대란기 제약 영업사원의 생존법

김재현 2024. 4. 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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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이탈 길어지자 대형병원 환자감소
리베이트 집중단속에 의사 만나기 부담
일부 제약회사는 영업부서 아웃소싱도
의과대학 정원 증원안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7일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의료관계자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엔 병원 대신 교수님 연구실이나 자택을 찾아가요. 방금도 다녀왔어요."

16일 한국일보와 연락이 닿은 국내 대형 제약사 중견 영업사원 A씨는 잘 아는 의대 교수의 연구실에 떡과 주전부리를 한아름 안기고 온 참이라고 말했다. 석죽은 그의 목소리는 통화 내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작년 연말 사내 우수사원으로 선정될 때만 해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으나, 이제는 영업 현장인 병원을 찾아가기도 어려운 신세다. 양손 가득 들고 가던 커피와 숙취해소제 보따리도 거둬들였고, 판촉물과 브로슈어에 붙이던 회사 홍보 스티커까지 뗐다. A씨는 "병원과 교수들 상황을 뻔히 아는데 예전 영업방식을 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보는 눈이 많은 병원 대신. 교수연구실이나 자택을 찾아 눈도장을 찍으려 한다"고 털어놨다.

두 달 넘게 전공의 집단 이탈 사태가 이어지면서 '빅5' 등 상급종합병원의 매출은 급감했다. 이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곳이 바로 제약업계와 영업사원들이다. 약을 팔기도 어려워졌을 뿐더러 의료대란 과정에서 의사와 영업사원 간 갑을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의사들을 당당하게 찾아가는 것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의료계 등에 따르면 서울아산병원은 지난달 13일부터, 삼성창원병원은 지난달 27일부터, 제약사 직원의 병원 방문을 금지했다. 표면적 이유는 전공의 이탈 탓에 과중한 업무를 맡은 교수들이 진료·수술·외래에만 집중하고, 불필요한 업무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주요 병원 역시 비공식적으로 영업사원들의 방문을 자제하도록 하고, 필요 시엔 전화나 이메일로 소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영업사원들은 그동안 관행처럼 이어지던 도시락·커피 배달, 의사 개인업무 처리, 지방출장 등이 과거에 비해선 분명하게 줄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사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진 만큼, 영업 부담은 훨씬 늘었다고 입을 모았다.

17일 오후 광주 동구 전남대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불법 리베이트를 단속 중인 것도 이들의 행동반경을 좁히는 요인이다. 보건복지부는 다음 달 20일까지 의약품·의료기기 불법 리베이트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하고 있다. 의약품이나 의료기기 판매를 목적으로 금전, 물품 등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거나 수수하는 행위가 대상인데, 유의미한 제보를 한 경우엔 최대 30억 원 보상금 또는 5억 원 포상금이 지급된다.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지방의 한 병원에 갔더니, 정장을 입고 판촉물 들고 있는 사람에게 사복경찰이 이것저것 물어보고 조사했다"는 식의 글이 올라왔다. 제약사 직원 B씨는 "교수들도 진료에 집중하고 있고, 피곤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며 "최근엔 한 교수 집 앞에서 경쟁 제약사 직원끼리 서로 마주쳐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전했다.

리베이트 단속과 영업 위축 상황이 지속되면서, 제약업계 영업 방식 역시 비용 절감을 위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유유제약은 최근 약국·의원을 상대로 하는 영업부서를 폐지하고 영업대행업체(CSO)에 관련 업무를 넘겼다. 업계 관계자는 "정기적으로 진행하던 각종 학술행사나 모임 등은 줄줄이 연기되거나 취소된 상황"이라며 "파업이 끝난다고 해도 완전 정상화에는 2,3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현장의 어려움이 당장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영업사원들은 '일단 소나기는 피해가자'는 식으로 사태를 관망 중이다. 당장은 약을 못 팔더라도, 정상화 이후를 노려 영업기반을 계속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얘기다. 중견 제약사 5년 차 영업사원 C씨는 "의사들은 오더라도 빈손으로 오라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떻게든 얼굴이라도 익혀 놓는 것이 중요하다"며 "성과가 저조하면 내 수입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고 말했다.

김재현 기자 k-jeah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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