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68]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빈상(顰像)’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2024. 4. 1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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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비슷한 자세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속칭 ‘빈상(顰像)’이라는 그림이다. ‘빈(顰)’은 얼굴을 찡그린다는 뜻이다. 반가부좌를 튼 이에야스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세간에 알려진 그림의 배경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와 연합군을 꾸려 다케다 신겐과 일전을 벌인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다. 이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숙적 신겐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신겐군에게 쫓겨 황망하게 도주하던 이에야스가 혼비백산한 나머지 바지에 탈분(脫糞)하고 말았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로 굴욕적인 패배였다. 이 전투는 당초 전력 열세를 우려한 참모들이 농성(籠城)을 건의하였으나, 상황을 오판한 이에야스가 고집을 부려 무리하게 야전(野戰) 공세에 나서면서 생애 최대 위기를 자초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

많은 부하를 잃고 겨우 살아 돌아온 이에야스는 실책을 통렬히 반성하면서 화사(畵師)에게 자기 초상화를 그리게 한다. 전투에 패한 직후 만감이 교차하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에야스의 당시 모습을 담은 그림이 빈상이다. 이에야스는 이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해 이 그림을 평생 좌우(座右)에 두고 교만과 만용을 자계(自戒)하는 교훈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빈상에 얽힌 이러한 스토리는 후세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제작 시기나 배경에 대한 정보도 메이지 시기 이후에 나온 속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다만 실증적 진위를 떠나 수신(修身)에 유용한 교훈적 가치가 큰 탓인지 이에야스의 인물됨을 보여주는 성공담으로 지금도 널리 인용되고 있다. 큰 실패 뒤에 더 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다만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과오와 진솔하게 대면하려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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