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한밤에 일어난 현수막 전쟁
지난달부터 서울 중구 덕수궁 앞에서 현수막을 뺏고 뺏기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18일 50대 남성 A씨가 집회 신고를 해두고 전현직 대통령과 대법관을 모욕하는 문구와 욕설이 적힌 현수막을 달면서 상황이 시작됐다. 보름 가까이 이를 지켜 보던 관할 공무원은 지난 4일 A씨가 귀가한 사이 현수막을 가져갔다. 이미 철거 계고장과 경고도 전달한 상태였다고 한다. 현수막을 수거한 공무원들은 곧바로 폐기 처분했다. 게시대로 전락한 가로수 8그루는 현수막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포승줄 같은 흰 밧줄에 묶여있는 상태다.
수거 열흘도 안 돼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걸리면서 2차전이 시작됐다. 수거 3일 뒤인 지난 7일, 현장에 나와 본 A씨는 그제서야 자신의 현수막이 사라진 걸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똑같은 내용의 현수막을 새로 제작해 자신의 차량에 보관하며 다시 게시할 기회를 노렸다. 공무원들이 근무하지 않고, 주말과 대규모 집회가 겹쳐 인파가 몰렸던 지난 13일 A씨는 자신의 현수막을 다시 게시했다. 엄정 대응을 예고한 지자체와 “두 번은 안 뺏긴다”는 집회자. 그들 간 현수막을 뺏고 뺏기는 싸움이 무한 반복될 예정이다.
정당한 공무집행은 왜 한밤중 벌어졌을까. 그동안 중구청을 비롯해 불법 현수막을 관리하던 지자체는 “집회 신고가 돼 있어 건드릴 수 없다” “명예훼손 당사자가 고소해야 철거 검토 가능하다”라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또 공무원 사이에선 “현수막을 잘못 건드렸다간 재물 손괴죄로 고소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컸다. A씨가 집회 신고한 시간이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 30분까지이기 때문에, 자정에 철거가 이뤄진 이유도 이 시간을 피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시간과 상관없이 현장에 집회자가 없는 ‘유령 집회’라면 정식 집회가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없고, 남아있는 현수막도 불법으로 봐야 한다.
마치 한밤의 비밀 작전처럼 이뤄졌지만 현수막 철거는 정당한 공무집행이었다. 민원이 빗발치고 본지가 취재를 시작하자 지자체는 철거를 위한 법률 검토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철거 당일과 전날 공무원들은 A씨를 설득하며 각종 법령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옥외광고물법 5조 2항이었다. 이 조항에는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광고물은 설치해선 안 된다’고 나와 있다. 또 10조의2 ‘행정대집행 특례’, 동법 시행령 40조 ‘제거된 광고물 보관 및 처리’ 조항도 현수막 철거 전 마지막 설득 근거였다.
뺏고 뺏기는 상황이 무한 반복되지 않으려면 엄정하고 명확한 법의 잣대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집회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법을 어겨선 안 된다. 질서 유지나 공공 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엔 자유도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 집회자가 아무리 떼를 쓰고 위세를 이용하더라도 불법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 공권력이 충돌을 피하기 위한 안일주의에 갇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법과 원칙이 설 자리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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