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꿈에 학생들 보인다” 세월호 교장의 은둔 7년

서보범 기자 2024. 4. 1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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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0주기] [3] 前 단원고 교장 김진명씨
2019년 4월 9일 충남 보령 성주 인근에서 '도의적 책임'을 물어 직위 해제된 전 단원고 김진명 교장이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김지호 기자

17일 오후 3시 충남 서천의 한 시골 마을.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교장이었던 김진명(69)씨가 19㎡(6평) 남짓한 컨테이너 앞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씨는 지난 2013년 9월 단원고 교장에 취임한 뒤 7개월 만에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2016년 은퇴한 그는 2019년 10월부터 지인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홀로 살고 있다. 그의 곁엔 진돗개 두 마리가 있었다.

김씨는 이날 본지 기자와 만나 “물속에서 아이들 시신을 건져 올리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요즘도 아이들과 교사들이 꿈에 자주 보인다”고 했다. 불교 신자인 그는 매일 새벽 3시 세상을 떠난 아이들과 교사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좋은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꼭 행복하게 지내고 나중에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지난 14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세월호 참사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팽목항은 세월호 참사 현장과 제일 가까운 항구로 2014년 참사 당시 수습된 희생자들의 시신이 이곳을 통해 들어왔다. /연합뉴스

김씨는 지난 2014년 참사 직후부터 그해 8월까지 경기 안산과 전남 진도를 오갔다. 4개월여를 팽목항에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는 “죄인 취급 당할 것을 알면서도 집에 머물기는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아 진도에서 자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바지선을 통해 아이들 시신이 인양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기도 했다. 그는 “물속에 오래 있어서 피부가 퉁퉁 부르튼 아이들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를 잃은 유가족들의 원망은 팽목항을 찾은 김씨에게로 향했다. 한 유가족은 김씨의 멱살을 잡고 “아이들을 살려내라” “왜 배를 태워 수학여행을 보냈느냐”며 원망했다고 한다. “당신도 우리 자식이 어떻게 됐는지 똑똑히 보라”며 멱살을 잡힌 채 시신 안치실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이 이해가 됐기 때문에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며 “살아야 하니 숨어서 끼니를 챙기고, 멀리서 구조 현장을 지켜봤다”고 했다. 김씨는 “유가족들에게는 대역 죄인이 돼 있었지만,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2014년 4월 16일 김씨는 평소처럼 제일 먼저 단원고로 출근했다고 한다. 2학년 수학여행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오전 7시 40분 학생들과 동행한 교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교장실에서 티타임을 갖고 있는데, 오전 9시 30분쯤 교무부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며 “‘빨리 전화 좀 받아보셔야겠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참사를 인지했다”고 했다. 김씨는 곧장 팽목항으로 내려갔다.

김씨는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양승진 교사와 평교사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 김씨는 “수학여행을 앞두고 담임들만으로는 200명이 넘는 아이들을 관리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학생과 소속 양 교사와 체육 교사였던 고창석 교사에게 따라가라고 했다”며 “아이들을 통솔하고 바람도 쐴 겸 동행하라 지시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고 했다. 양 교사를 포함해 단원고 학생 남현철·박영인군, 일반인 승객 권재근·권혁규 부자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당시 수학여행에는 강민규 교감을 포함해 교사 14명이 동승했는데, 이 중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사 당시 구조됐던 강 교감은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에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씨는 “교감이 현장을 따라갔었기 때문에 유가족들로부터 많은 원망을 들어야 했다”며 “끝까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아이들을 뒤로한 채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매우 힘들어했다”고 했다.

김씨는 “자꾸 상태를 물으면 더욱 마음이 아플까 봐 얘기를 많이 나누지 못했는데, 그 점이 후회된다”고 했다. 김씨는 “일단 안산에 올라가 진정하고 다시 내려오라”고 권했지만, 강 교감은 “자리를 지키겠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김씨는 “사고 이튿날인 17일 강 교감이 매우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어 곁에 두고 혼자 어딜 가지 못하게 했었다”며 “제가 잠깐 학부모들을 대면하고 온 사이 교감이 사라졌다”고 했다. 함께 있던 교사들에게 “빨리 찾아보라”고 하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강 교감은 다음 날인 18일 오후 전남 진도군 진도실내체육관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7일 오후 3시쯤 충남 서천군의 한 컨테이너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경기 안산 단원고 교장을 지낸 김진명씨가 책장을 손으로 짚으며 그동안 마음을 달랬던 불교 서적을 꺼내 보이고 있다. /김영우 기자

김씨는 “당시 교사들도 어떻게 보면 비극적인 사고의 피해자였는데, 생때같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교사와 학교가 일종의 ‘적’이 돼버린 상황이 마음 아팠다”고 했다. 김씨는 “당시 체육관 구석에 쭈그린 채 앉아있던 한 어르신이 제가 교장인 줄 알고 찾아왔었다”며 “작은 목소리로 ‘제 아들이 교사인데 제발 아들 시신만 찾아달라’며 애원했다”고 했다. 그는 “어르신이 ‘저는 아들 시신만 찾으면 떠나겠다’며 애원하는데 수많은 아이들이 사고를 당한 상황에서 슬픔을 내색할 수 없어 보였다”고 했다.

참사 이후 김씨의 삶도 멈췄다. 참사 두 달 뒤인 2014년 6월 직위 해제됐고, 그해 9월 경기 화성시의 한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났다. 2015년 3월에는 다시 정직 3개월 처분을 받았다. 새로 발령된 중학교에선 “왜 세월호 교장이 아직 우리 학교에 있나”라는 민원이 빗발쳤다. 김씨는 2016년 10월 정년을 10개월 앞두고 아버지 고향인 충남 서천 인근 보령시로 내려갔다. 3년 뒤 현재 머무르는 서천의 컨테이너로 거처를 옮겼다.

김씨는 신문·방송 등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일절 끊고 지내고 있다. 참사 이후 불교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는 김씨는 “모든 현상은 허상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모든 현상은 마음에 투영된 것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라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고통이 줄어들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는 세상을 조금 등지고 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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