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과의 전쟁’이 낳은 괴물…스피릿 세이프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김지호 기자 2024. 4. 1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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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주위에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입맛은 제각각이고 위스키 종류는 수천 가지. 본인의 취향만 알아도 선택지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주정뱅이들과 떠들었던 위스키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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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글랜드로낙 증류소. 증류기 옆에 위치한 스피릿 세이프 모습. /김지호 기자

증류소에는 전면이 유리판과 황동색 구리로 설계된 금고가 있습니다. 스피릿 세이프라고 불리는 이 장치는 증류 과정에서 생산되는 모든 원액을 분석하고 제어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증류를 통해 스피릿 세이프로 흘러 들어간 스피릿(Spirit : 증류액)은 ‘컷’(Cut)이라고 불리는 증류 기술에 의해 분류됩니다. 컷이란 적당한 타이밍에 스피릿의 핵심적인 결과물만 얻어 내고 나머지는 쳐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소변 검사를 할 때 처음 나오는 소변은 버리고 중간 부분으로 검사를 진행합니다. 소변의 처음과 끝에는 검사에 방해되는 오염물질이 함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스키 스피릿을 뽑아내는 컷 과정도 비슷합니다. 증류를 통해 흘러나오는 스피릿은 보통 초류, 중류, 후류 총 3가지로 분류됩니다. 증류 초반에 흘러나오는 초류는 알코올 도수가 80도에 육박하며 메탄올 같은 유해 성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자칫 눈이 멀 수도 있어서 따로 분류를 해놔야 합니다. 초류를 어느 정도 흘려보내면 알코올 도수가 75도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때부터 스피릿의 가장 핵심이 되는 중류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으로 위스키에 쓰일 원액이 흘러나오는 시점이죠. 알코올 도수가 65도 아래로 떨어지면 후류로 분류됩니다. 이 부분은 알코올 도수가 너무 낮고 잡내 때문에 초류랑 합쳐서 재증류 과정을 거칩니다.

이렇게 가장 ‘맛있는 부분’만 뽑아낸 중류는 전체 증류액의 20~60%를 차지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스피릿은 오크통에서 숙성을 거쳐 위스키로 탄생하게 됩니다. 보통 스카치의 경우 스피릿 도수를 63.5도로 맞춰서 숙성합니다.

컷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스피릿의 풍미가 달라집니다. 위스키 맛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마스터 디스틸러의 실험정신과 역량이 발휘되는 부분이죠. 하지만 이 황동빛 금고는 단순히 스피릿만 받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는 아닙니다. 정확히는 증류소가 ‘나쁜짓’ 안 하고 정직하게 주세를 납부 하는지 감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세금 투쟁으로 일궈진 스카치의 역사

스카치의 역사는 ‘세금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644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최초로 위스키에 세금을 부과합니다. 이때만 해도 세금이 높지 않았고 단속도 심하지는 않은 허울뿐인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국이 합병되면서 1713년부터 ‘맥아세’가 생겨납니다. 맥아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모든 것에 대해 과세하는 법이었죠. 내전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동났던 국고를 충당해야 했습니다. 때마침 합병으로 인해 군기를 잡아야 했던 스코틀랜드가 세금 걷기에는 제격이었죠. 그렇게 잉글랜드는 위스키에 엄청난 양의 세금을 매기기 시작합니다.

맥아세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생존권과 직결돼 있던 문제입니다. 증류 기술만은 절대 빼앗길 수 없는 권리라고 생각한 스코틀랜드는 쉽사리 이러한 법안을 인정할 수 없었겠죠. 그들은 증류기를 통째로 들고 하이랜드 지역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세금을 피해 불법 증류를 이어갔습니다. 밀주업자와 세금 징수원 사이에 쫓고 쫓기는 목숨 건 ‘밀주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100년 넘게 지속된 밀주전쟁은 1823년 소비세법(Excise Act 1823)이 발현되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소비세법은 증류주에 대한 합리적인 세금을 설정하고 탈세를 막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또 증류소 간 공정한 경쟁의 장을 조성하고 소비자가 일관된 품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필수적인 법안이었습니다. 소비세법은 밀주업자들이 합법적으로 증류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줬습니다. 스코틀랜드 증류소들의 공식 설립 날짜가 1823년대 언저리인 게 우연은 아니죠. 하지만 100년 넘게 이어진 세금 징수원과 증류 업자와의 ‘애증’ 관계가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족쇄가 된 스피릿 세이프

스코틀랜드 발베니 증류소. 증류기 옆에 있는 스피릿 세이프 모습. /김지호 기자

1820년대 제임스 폭스(James Fox)의 특허품인 스피릿 세이프는 소비세법에 따라 증류소 내 필수품이 됐습니다. 세금 징수원들에게 스피릿 세이프는 증류 작업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한 수단이었습니다. 당시 순수 알코올 1갤런(약 3.8리터)당 10파운드의 수수료와 관세를 더한 금액을 내면 합법적인 증류로 인정이 됐습니다. 하지만 증류 업자에게는 족쇄나 다름없었겠죠. 합법적인 증류를 하기 위해서는 증류소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이 황동빛 골동품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 기관이 증류에 대한 단독 통제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시점이죠.

밤새 밀주를 찾아 험준한 하이랜드 산길을 헤매던 세금 징수원들은 팔자가 폈습니다. 그들의 업무가 추적에서 감찰로 바뀐 것이죠. 세금 징수원들은 이제 다리 뻗고 증류소에서 상주하며 스피릿 세이프와 숙성고만 관리하면 됐습니다. 당시 증류소는 이들을 위해 방까지 내줘야 했고 숙식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했습니다. 적과 동침이 시작된 것이죠.

세금 징수원이 스코틀랜드 '글렌 오드' 증류소의 스피릿 세이프를 잠그고 있는 모습. /디아지오

세금 징수원들의 허리춤에는 늘 두 개의 열쇠가 달려있었습니다. 하나는 스피릿 세이프를 여는 용도고 하나는 숙성고 열쇠입니다. 증류소의 가장 핵심이 되는 열쇠를 갖고 있었던 셈이죠. 하지만 이는 곧 도벽으로 이어졌고 여차하면 위스키를 빼먹는 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스피릿 세이프를 잠글 때 열쇠 구멍에 작은 종이를 한장 껴놨습니다. 누군가 자물쇠를 여는 행위를 시도한다면 종이가 바로 찢어졌겠죠. 악랄한데 치밀하기까지 했습니다. 절대 권력 앞에서 증류 업자들은 혀만 찰 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국가의 이러한 규제는 1870년까지 지속되다가 위스키 붐으로 인해 점점 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증류소가 우후죽순 늘어나는 데 반해 세금 징수원들이 부족해진 것이죠. 그렇게 위스키의 생산규제는 1983년 이후 해제됐으며 증류소가 자율적으로 증류의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는 세금 징수의 기능은 퇴색했지만, 증류소에 가면 스피릿 세이프 안에서 증류액이 콸콸 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버튼 하나로 모든 증류 과정이 끝나는 최신식 증류소도 있지만, 10분 단위로 스피릿을 관찰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곳도 많습니다. 증류는 과학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창작 본능과 과학의 접점에서 비로소 새로운 맛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칫 골동품처럼 보이는 이 황동빛 금고는 선대 때부터 이어온 여러 증류 업자들의 노고가 짙게 배어있는 장치임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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