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태평로 닦기 위한 토지매수, 日지주들만 호가 높이며 거부[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총독부, 남대문로 등 새 대로 닦아
당시 경성 정착한 일본인 땅주인들, 매각 협상 불응하며 끝까지 버티기
조선인은 재산권 제대로 주장못한듯
《도시개발 출발점 ‘시구개정’ 사업
‘매일신보’ 1913년 8월 24일자에는 ‘시구개정과 공공심’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그 한 대목을 보면 “근래 경성 내 각 도로를 개수함에 따라 자연히 인민의 가옥을 범하는 곳이 많은지라. 인민된 자는 반드시 공익을 생각하여 당국의 지휘를 따를 뿐이어늘 혹 완거(頑拒)하는 자도 있으며 혹 가격을 과호(過呼)하는 자도 있다.
목하 조선인은 이를 깨달아 완거하는 자도 거의 없으며 가격을 과호하는 자도 역시 없어 도로의 확장에 조금의 민원이 없을진대, 내지인(內地人)은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오히려 완거하는 자도 많으며 가격을 과호하는 자도 많으니 저 문명의 선진으로 자부하는 자가 어찌 이런 치우친 마음을 가졌느뇨?”라고 썼다.》
1910년 한국병합 직후부터 총독부는 ‘경성 시구개정’이라는 이름으로 시내의 도로 정비를 시작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성의 도시 개발, 정비의 출발점이 된다. 시가지의 구획을 바르게 고친다는 뜻의 시구개정(市區改正)은 다른 도시에서도 실시했다. 그러나 지방 도시의 시구개정은 주로 도청 소재지에서 제한된 지방비 예산으로 ‘도청 앞 대로’ 하나 정도를 정비하는 데 그쳤다. 그에 반해 경성 시구개정은 총독부가 직접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경성은 여러 도시 중 하나가 아니라 식민 통치의 핵심 기구가 모여 있는 명실상부한 ‘식민지 수도’였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식민지 수도를 정비하여 그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 곧 식민 통치의 ‘정당성’(조선에 근대 문명을 전파하겠다)을 널리 선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총독부가 보여주려고 한 ‘도시의 문명화’였다. 경성 시구개정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온 “어떠한 나라를 막론하고 우선 도로를 시찰하여 정정유조(井井有條)하면 그 나라의 문화와 정치는 문명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우선 경성의 도로를 직선으로 사통오달(四通五達)하여 정정유조케 하여 일대 모범을 보인다 하니 이는 총독이 조선을 계발하는 노심노력에서 나옴”이라는 말(매일신보 1912년 11월 7일자 사설 ‘시구개정’)은 총독부가 시구개정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배경과 목표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총독부의 야심 찬 시구개정 사업은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도로 부지를 매수하는데 토지 소유자들이 총독부가 제시하는 가격에 쉽게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에 이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예컨대 황금정통의 경우 공사를 위해 매수해야 할 토지의 소유자는 총 82명이었는데 그중 19명이 1년 가까이 매수 협상을 거부했다. 마지막까지 협상을 거부하여 ‘토지수용령’ 적용을 받은 사람은 마쓰모리(末森富良)라는 자였다. 남대문에서 종각에 이르는 남대문통의 경우도 사정이 복잡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전통적인 상권이 있던 곳인데, 1880년대에는 청나라 상인이 진출하여 자리를 잡았다. 1890년대부터는 일본 상인도 진출하여, 서로 경쟁이 치열했다. 거기다가 드물게 서양인 소유 토지도 있었다. 남대문통의 정비를 위해 매수해야 할 토지 소유자는 100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도로 부지의 매수 교섭에 계속 응하지 않는 20여 명은 일본인들이었다.
앞의 사설에 등장하는 총독부의 교섭에 “완거하는” 혹은 “가격을 과호하는” “내지인”이란 바로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대부분 무명의 인사로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나마 마쓰모리는 러일전쟁 참전 군인 출신으로 제대 후 다시 조선에 건너와 경성에서 주택 임대업, 토지 신탁업 등으로 치부한 사람으로 확인된다. 1세대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개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부산, 인천, 원산 등 개항장에 정착한 일본인은 서울로도 진출했다. 서울에 일본인의 거주를 공식적으로 허가한 것이 1885년경이다. 이들은 주로 상인이었다. 대개 변변한 자본 없이 ‘신천지’ 조선에서 성공을 노리는 모험 상인이 많았다. 당시 이런 자들을 ‘히토하타구미(一旗組·한탕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후 통감부 시기부터는 일제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2세대 일본인이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관리, 교사, 회사원 등으로 1세대에 비해 엘리트층이었다.
요컨대 마쓰모리는 1세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식민 통치의 대의(?), 식민지 수도의 문명적 정비 따위보다 오직 자신의 재산이 중요할 뿐이었다. 식민지 수도를 정비하여 자신들의 힘을 조선인에게 과시하려는 총독부와 오직 사익만을 추구하는 개별 일본인의 이해관계는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로 부지의 매수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난 토지 소유자가 대부분 일본인인 것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들은 지배 민족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비록 총독부 기관지의 비난은 받을망정 자기 재산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인은 그러지 못했던 게 아닐까? “조선인은” “도로의 확장에 조금의 민원이 없”다는 총독부 기관지의 칭찬(?)은 식민지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경성 시구개정은 총독부가 추구하는 식민지 수도 정비의 목표, 개별 식민자(일본인) 각각의 사익 추구, 일제의 일방적 사업 추진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민의 처지가 부딪치고 뒤엉키는 가운데 진전되었다. 경성의 개발과 정비는 단지 공간의 물리적 변형 과정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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