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접기 까먹어도 포기 안해” 치매 노인이 피운 종이 튤립 1080송이

강지은 기자 2024. 4. 17.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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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후 찾은 서울 은평구 치매안심센터 2층 화단. 알록달록한 종이 꽃사이에 ‘치매극복’이라는 단어가 꾸며져 있었다. 경증 치매 환자 김운자씨가 1080송이의 종이 꽃으로 만든 작품이다. /강지은 기자

“색종이는 정말 좋은 친구. 화가 나서 내팽개쳐도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미안해져 색종이를 다시 집어 든다.”

지난 9일 오후 찾은 서울 은평구 치매안심센터 2층 화단은 알록달록한 종이 꽃으로 가득 차있었다. 화단 중간에는 ‘치매극복’이라는 단어가 종이 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는 경증 치매 환자 김운자(74)씨가 만든 작품이다. 김씨는 “가로와 세로가 7.5cm인 색종이로 올해 1월부터 100일동안 밤낮없이 1080송이의 튤립 꽃을 접었다”고 했다.

김씨는 이 화단 앞에 위치한 카페 ‘고정형 기억다방(반갑다방)’에서 작년 7월부터 일하고 있다. 지난 겨울 약 두 달간 카페가 휴점하자, 김씨는 썰렁해진 카페 앞 화단을 꾸며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김씨는 “카페 일을 잠시 안 했을 때 아들이 출근하고 나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참 무기력했다”며 “곧 봄이 오니 예쁜 튤립을 접으면 우울감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종이접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치매 증세 때문에 종이 접는 법을 종종 까먹었다고 했다. 김씨는 “분명히 몇 시간 전에 튤립을 접었고 수백 번도 넘게 똑같은 종이 접기를 했는데, 갑자기 종이 접는 법이 기억나지 않으면 화가 나 바닥에 색종이를 던진 적도 있다”며 “그러다가도 괜히 종이한테 화풀이를 한 것 같아 미안해 색종이한테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종이 꽃 한 송이를 접을 때마다 치매를 극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했다”고 했다.

김운자씨가 치매 증세로 종이 접기 방법이 기억나지 않아서 색종이를 집어 던진 후, 색종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색종이 뒷 장에 쓴 편지. /강지은 기자

김씨는 최근 ‘기억다방’ 카페 동료들에게 종이접기 방법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날 만난 김씨는 “선을 딱 맞춰야 해요. 손톱으로 한번 쫙 그으세요. 잘했어요”라며 동료에게 장미 꽃을 접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씨의 동료 홍모(72)씨는 “아직 처음이라 어렵지만, 한 송이라도 완성하려고 노력 중”이라며 “여름에는 화단을 종이 장미로 가득 채우고 싶다”고 했다. 올해 3월부터 기억다방에서 김씨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최모(65)씨는 “화단에 꽃으로 ‘치매극복’ 네 글자가 쓰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어머니가 치매로 고생을 하셨는데 이런 따뜻한 곳에서 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고 눈물 흘리며 말했다.

지난 9일 서울 은평구 치매안심센터 2층 화단 앞에서 자신이 만든 종이 꽃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김운자씨 모습. /강지은 기자

김씨는 앞으로 더 많은 치매 환자들과 함께 종이 꽃 접기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내가 종이 꽃으로 화단을 만들자 남동생도 기뻐하며 꽃들이 비를 맞을까봐 투명 플라스틱 판으로 보호막을 만들어줬다”며 “나와 내 주변 사람의 보물이 된 종이 꽃 접기를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희망을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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