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워지는 남중국해 갈등, 잠들지 못하는 폐군함

2024. 4. 17. 14:1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전 정권 ‘남중국해 영유권 싸고 중국과 밀약’ 폭로로 소란
현 정권은 미·일과 밀착에 중국선 불만…미·중 갈등 비화 우려도
지난해 11월 10일 필리핀 해안경비대가 남중국해(서필리핀해) 세컨드 토마스 암초에 좌초된 시에라 마드레함 인근을 순찰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 폐군함이 가장 첨예한 지정학적 갈등의 축이 되고 있다. 남중국해(필리핀명 서필리핀해) 세컨드 토마스 암초(중국명 런아이자오, 필리핀명 아융인)를 지키고 있는 시에라 마드레함의 이야기다. 시에라 마드레함은 미국이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상륙함(LST)으로 건조한 군함으로, 현재는 더 이상 기동할 수 없는 완전히 녹슨 군함이다.

필리핀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무력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1997년 세컨드 토마스 암초에 시에라 마드레함을 고의로 좌초시켰다. 이후 시멘트와 케이블 등으로 이 배를 모래톱에 연결했다. 현재까지도 자국 군함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병력 10여명을 상주시키며 주기적으로 보급 업무를 하고 있다. 필리핀 북부 루손섬의 산맥에서 이름을 따온 시에라 마드레함은 그렇게 필리핀 최서단 수역을 지키는 방어선이 됐다.

중국·필리핀, 영유권 다툼 격화

시에라 마드레함이 조용히 잠들기는 당분간 불가능해 보인다. 최근 남중국해가 부쩍 뜨거워지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친중 성향이었던 이전 정권이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두고 중국과 밀약을 맺었다는 폭로가 나와 소란이 일고 있다. 지난 3월 말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대변인이었던 해리 로케는 당시 정권이 중국과 남중국해를 두고 구두 합의를 맺었다고 폭로했다. 필리핀이 세컨드 토마스 암초에 필수 물자만 보내고 시설 보수나 건설은 하지 않기로 두테르테 당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합의를 맺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직접 진상을 확인하겠다고 나섰다. 필리핀 매체 인콰이어러에 따르면,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4월 10일 “앞으로 황시롄 필리핀 주재 중국대사를 만나 그런 합의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만약 있었다면 합의 조건과 관련 당사자 등에 관해 설명을 듣겠다”고 밝혔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비밀 합의로 필리핀 영토와 주권을 타협했다는 생각에 경악했다”며 합의 내용을 전혀 들은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두테르테 정부 관계자들에게도 답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중국은 필리핀이 불법으로 암초를 점거하고 영구 점령을 추진하고 있다며 시에라 마드레함을 예인하라고 요구해왔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U자 형태로 9개 선(구단선)을 긋고 그 이내에 있는 영역 약 90%가 중국 영해라고 주장한다. 필리핀이 국제상설재판소(PCA)에 소를 제기해 2016년 중국의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받아냈지만, 중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필리핀이 시에라 마드레함으로 보급에 나설 때 중국 측이 레이저나 물대포를 쏘거나 경로를 방해하면서 양측 간 물리적 충돌로 번진 적도 드물지 않다. 지난달에도 중국의 물대포 공격으로 필리핀 선원 4명이 다쳤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조 바이든 미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왼쪽부터)가 4월 11일 미 백악관에서 정상회의를 했다. / AFP연합뉴스



남중국해 갈등 어디까지 가나

시에라 마드레함으로 상징되는 남중국해 갈등은 중국-필리핀 양국 차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필리핀은 최근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전통의 동맹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도 손을 잡고 있다. 4월 11일 미국 워싱턴에선 사상 첫 미국·일본·필리핀 정상회의가 열렸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따로 만난 적은 여러 차례지만, 이 3개 국가의 정상이 별도 논의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건 전례가 없다.

3국 정상회의의 핵심 의제가 남중국해 공동 대응이라는 점은 일찌감치 확인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4월 7일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이 남중국해에 있는 시에라 마드레함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1951년 체결된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은 어느 한 나라가 제삼자의 공격을 받으면 양국이 서로 방어를 돕는 것을 골자로 한다. 중국이 시에라 마드레함을 비롯해 남중국해에서 필리핀에 공격을 가한다면 미국도 이해당사자가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 것이다.

미국과 필리핀은 오는 6월까지 대규모 합동 훈련을 한다. 미군과 필리핀군은 이달 초 연례 합동훈련 ‘살락닙’을 시작했으며 이달 말에는 합동훈련 ‘발리카탄’을 개시한다. 살락닙 훈련에는 보병 작전, 도심지 진입 훈련, 정글 지역 작전, 대전차 작전 등이 포함된다. 발리카탄 훈련은 양국의 최대 연례 합동훈련이다. 미국은 발리카탄에 일본 자위대의 공식 참가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오는 6월 1∼10일엔 필리핀의 요청에 따라 양국 육군이 새로운 합동 훈련을 하기로 했다.

이처럼 필리핀이 미국·일본과 밀착하는 것을 두고 중국은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동안 중국은 미국을 비롯해 남중국해와 관련 없는 주체들이 개입함으로써 갈등을 키운다고 주장해왔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GT)는 4월 11일 사설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양자 동맹을 배타적인 소그룹으로 격상시키려는 리더 역할이다.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패권을 장악해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필리핀을 두고는 3국 중 ‘최약체’라며 “미·일 전략적 필요에 맞춰 양국의 신뢰를 얻고 포괄적인 정치·외교·군사적 지원을 받기를 바라는 일방적인 종속국일 뿐”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아울러 “미국이 올해 대선을, 일본은 내년 총선을 치르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면 3국 간 협력이 이어지리란 보장이 없다”고 평가했다.

필리핀 내에선 남중국해 문제가 필리핀의 주권 수호를 위한 싸움을 넘으면서 필리핀이 미·중 강대국 간 세력 다툼의 전장이 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지난 4월 9일 필리핀 마닐라 중국영사관 인근에선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물러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필리핀 정부에도 평화적 해법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한 집회 참가자는 “국면의 급격한 변화가 우려스럽다. 우리는 전쟁을 통한 해법을 지지하지 않는다. 남중국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일본 등에 의존하는 마르코스 행정부를 비판한다”고 SCMP에 밝혔다. 티니오 ‘주권을위한필리핀연합’ 대변인은 “미국이나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착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독립적이면서 중국과 싸울 수 있는 외교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