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고분고분 자백 작전으로 일제 경찰을 속여넘기다

한겨레21 2024. 4. 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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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항일학생운동 확산하려던 조두원, 일관된 위장 진술로 비밀결사 존재와 구성원 지켜내
1930년 2월12일 경기도경찰부에서 취조받을 당시 촬영된 조두원. 국사편찬위원회

1930년 1월29일, 수요일 새벽이었다. 영하 4.3도의 추위를 뚫고 경기도 경찰부 예하 형사대가 동대문경찰서 관할구역에 소재하는 살림집 10곳을 일제히 덮쳤다.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이 전 조선으로 옮겨붙은 때였다.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광주에서 두 차례 가두시위운동이 벌어지고, 서울에서도 12월9일, 1월15∼16일 두 차례에 걸쳐 연합가두시위가 터져 나온 직후였다. 각 학교에서는 동맹휴학, 격문 살포 등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 불길은 평양, 함흥 등 지방 도시로 번지고 있었다.

광주에서 전국으로 불길 번진 학생항일운동

경찰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학생운동을 저지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새로운 불길이 재발하지 않도록 봉쇄하는 것이 중요했다. 막지 못한다면 저 악몽 같은 3·1운동이 다시 일어나기 십상이었다. 위기 국면이었다.

1월 하순 서울 시내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 사건이 터졌다. 사그라지는 불길을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배후에서 부추기는 자가 있다는 점. 혐의자는 비밀 운동에 통달한 자였다. 정체가 누군지, 어디에 거처하는지 정보가 좀체 입수되지 않았다. 다만 작은 단서가 있었다. 밀정의 첩보에 의하면 그는 동대문 안 어딘가에 거주하고 있으며, 나이 어린 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놀라울 만큼 성실하다는 사실.

경찰은 이 실마리를 중하게 다뤘다. 제일고등보통학교 1학년 재학생으로 동대문 안 부근에 숙소를 두고 있는 자를 전수 조사했다. 27명이었다. 이 중에서 의심스러운 곳을 추렸다. 10곳이었다.1

경찰 지휘부는 다수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형사대를 편성해 10곳 살림집을 일제히 검색했다.

동대문과 동소문 사이 해발고도 124m의 나지막한 언덕은 낙산이라고 불린다. 그 산 언덕길로 올라가는 동숭동 130번지 22호, 자그만 집에서 의심스러운 자가 체포됐다.2

조두원이 1930년 1월29일 체포된 곳. ‘경성부지형명세도’ 1929년.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자칭 박창성이라고 했다. 원산에 있는 ‘동해당’이라는 약국의 점원인데 서울로 출장 왔다고 한다. 명함도 있었고 약재 매매문서도 제시했다.

경찰은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으므로 그 청년을 ‘준열하게 추궁’했다고 수사 보고서에 썼다. 엄하고 매섭게 추궁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명하다. 일본 경찰이 거의 모든 사상범 혐의자에게 자행하던 고문과 악행일 터. 취조 당시 촬영한 피의자 사진에 준열한 추궁의 흔적이 남았다. 체포된 뒤 14일째 되던 1930년 2월12일에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에서 찍은 것이다. 피검 당시 입고 있던 짙은 색 한복 두루마기 차림인데, 목둘레에 검은 때가 끼어서 꼬질꼬질했다. 머리카락은 짧은 스포츠머리였다. 뒷머리와 옆머리를 치올려 깎고 정수리 머리카락을 평평하게 다듬었으나 그새 자라서 더부룩했다. 콧수염과 턱수염도 거뭇거뭇했다. 체포된 이후 세면과 면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초췌하다. 표정이 경직돼 있고 불안해 보인다.

경찰 취조에 순순히 자백한 청년

추궁 끝에 결국 청년은 본래 이름을 자백했다. 조두원(趙斗元, 27). 4년 전인 192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2학년에 재학하던 중, 6·10만세운동 관련 혐의로 경찰 추적을 받던 자였다. 교묘히 국외로 탈출해 행방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해 8월25일자로 수배령이 내려졌다.

정체를 드러낸 청년은 고분고분해졌다. 경찰의 심문에 순순히 답하는 태도를 취했다. 국외로 탈출한 뒤에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모스크바공산대학 입학 경로는 어떠했나. 공산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으로 되돌아올 적에 부여받은 사명은 무엇인가. 조선에 들어온 뒤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경찰이 청년에게 진술하라고 요구한 물음들이었다.

언론은 이 사건을 가리켜 ‘조두원 사건’이라 불렀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가 체포된 지 10일째 되던 2월8일까지 검거된 연루자가 여섯 명이었고 취조 여하에 따라 검거 선풍이 지방으로 확대될 것 같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급기야는 고향인 강원도 양양군 현내면 후포매리 자택으로 형사대를 보내 피의자의 부친인 조종구(53)마저 서울로 압송해 왔다.

하지만 취조는 오래가지 않았고 14일 만에 종료됐다. 경찰은 2월12일자로 취조를 마치고 피의자를 검사국에 송치하기로 결정했다. 연루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별다른 혐의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풀려났고 부친 조종구도 곧 석방될 예정이었다.

조두원의 ‘범죄’ 사실은 검사국에서 작성한 ‘공판 청구서’에 요약돼 있는데 일본 경찰이 파악한 정보의 윤곽을 잘 보여준다.

1930년 2월14일 경기도경찰부가 작성한 ‘조두원사건 수사보고서’ 첫 쪽. 임경석 제공

“1926년 6월10일 고(故) 이왕(李王) 장의를 기회로 하여 조선민족운동을 야기하고자 하다가 관헌에 발견되어 해외로 도주해, 모스크바 동방노동대학에 입학해 1929년 4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국제공산당 태평양부원 미국인 베진스끼씨와 회견하고, 운동비 660원을 받고,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세력 만회의 중대 사명을 띠고 조선에 와서, 최근 학생사건을 일부 조종하면서 그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체포된 것이다.”3

조두원이 1926년 6·10만세운동에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관헌의 검거를 피해 국외로 도주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에 당과 공청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다. 조두원에게 발부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의 신임장은 그해 5월12일자였다.4 6·10만세운동 발발 한 달 전이다.

경찰은 조두원의 ‘범죄’ 행동이 국제공산당에 연결됐지만 별다른 조직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봤다. 경찰이 작성한 내밀한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원래 조두원은 엠엘(ML)계((1926년 조선공산당 안에 성립한 분파) 인물로 조선 내에 유력한 동지가 없어서 아직 구체적 운동에 착수하지 못했다”는 평가다.5

위장 진술로 조직과 동료들 보호

하지만 이 평가에는 옥석이 뒤섞여 있다. 조두원이 자신을 가리켜 ‘엠엘계 인물’이라고 주장한 것은 자기 동료들의 노출을 회피하기 위한 위장 진술이었다.

피고인 조두원이 자신의 ‘범죄’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기 때문일까. 그에 대한 사법 절차는 빠르게 진행됐다. 그해 3월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이 이뤄졌고, 3월12일 제2회 공판에서 징역 3년형의 판결이 내렸다. 조두원이 항소를 포기했으므로 형이 확정됐다.

징역 3년형을 언도받은 바로 그날 조두원은 서대문형무소 기결감으로 이송됐다. 수형자카드 ‘입소 연월일’ 항목에 ‘1930년 3월12일’이라고 적혀 있다. 그다음 날에는 수형자카드에 부착할 사진을 찍었다. 붉은 벽돌담을 배경으로 솜을 넣고 누빈 방한용 죄수복 차림이다. 머리는 빡빡 밀었다. 조두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표정을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심리적으로 안정돼 보인다.6

1930년 3월13일 서대문형무소 기결감에 수용된 조두원. 국사편찬위원회

기결감에 들었을 때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현상은 사상범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경험이었다. 경찰의 혹독한 취조를 더는 겪지 않아도 되고, ‘준열한 추궁’이 주는 고통과 공포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조두원도 그랬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남모르는 깊은 감회가 숨겨져 있었다.

저들의 강압과 고문 속에서도 조두원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존재를 끝까지 은폐할 수 있었다.

코민테른기록원에서 발굴한 운동 당사자 자료에 따르면, 그는 비밀결사의 최고위급 지도자였다. 1929년 6월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 동방부에 의해서 선발된 조선공산당 재조직을 위한 세 명의 전권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저명한 사회주의자 김단야, 김정하와 더불어 막중한 권한을 부여받았다.7

26살의 젊은 나이에 조선 혁명의 진로를 좌우하는 한 사령관이 된 셈이었다. 세 사람은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해 10월 서울 한복판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준비위원회’와 ‘고려공청 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국제공산당이 직접 지도한다는 의미로 뒷날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국제선’이라고 불린 사회주의 비밀결사들이었다.

조두원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는 비밀결사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도 노출하지 않은 점이다. 그는 비밀결사 설립 초기부터 관여했고 그 조직의 집행부 성원이었기에 사회주의자를 많이 파악하고 있었다. 조직 구성원들의 본명과 가명, 그들의 역할과 소재지 등을 꿰뚫고 있었다. 조두원은 그중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발설하지 않았다.

비밀결사 조직 최고위급 지도자

조두원의 모스크바 파견 신임장. 1926년 5월12일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과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의 친필 서명이 나란히 있다. 임경석 제공

경찰에 체포된 조두원은 어떻게 자신과 동료들을 보호할 수 있었는가? 진술 투쟁에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장 진술을 통해 단독범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앞뒤 모순 없는 치밀한 진술 기조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물증을 빼앗기지 않은 점도 큰 역할을 했다. 체포 당시에 아무런 증거도 압수되지 않았다.

조두원은 비범한 항일 지하운동가였다. 강압과 고문 속에서도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갖췄고 자신이 속한 비밀결사의 존재와 그 구성원을 끝내 보호하는 데 성공한 것을 보면 말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참고문헌

1. 경기도경찰부장, ‘京高秘第1021號, 共産黨員趙斗元檢擧ニ關スル件’, 1930년 2월14일, 5쪽, <思想에 關한 情報綴 第2冊>, 국편한국사DB https://db.history.go.kr

2. 오늘날에는 지번 체계가 바뀌었다. 일제하에는 130번지가 1~51호까지 세분됐는데, 오늘날에는 1~12번으로 구분돼 있다. 3~4개 택지가 통합돼 재편됐다. 현주소로는 ‘동숭3길 6-12’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3. ‘국제공산당의 태평양부원 베씨’, <조선일보> 1930년 3월2일

4. Мандат т.Тё Дувона(조두원 신임장), 1926년 5월12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547 л.2

5. 경기도경찰부장, 앞의 글, 1쪽

6. 서대문형무소, ‘조두원 수형자카드’, 1930년 3월13일 촬영(보존원판 12278호),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편 한국사DB

7. 김단야, ‘1929년에 조선 가서 일하든 경로’, 1937년 2월23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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