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의 승리 선언, 그러나 불안한 미래

이종태 기자 2024. 4. 1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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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은 일본이 유례없는 과격한 시도로 성취했다는 ‘정상적 경제 시스템’이 그대로 안착할 수 있을지 주시하고 있다. 당분간 일본 당국의 인플레이션 발표를 지켜보게 될 것이다.
2009년 12월2일 할인 광고가 붙어 있는 일본의 한 신발 가게.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된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이후 30년간 지속됐다. ⓒEPA

“그렇다. 우린 모두 일본인이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연구원 제이컵 펑크 키르케고르가 2019년 9월 발표한 보고서의 제목이다. 키르케고르는 일본인이 아니다. 그가 활동해온 미국 등 서방국가의 당시 경제 상황이 일본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린 모두 일본인’이란 강력한 수사로 표현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 상황이 어땠기에? 1990년대 초반 ‘자산시장 거품’이 폭발한 이후 일본은 거의 30년 동안 디플레이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980년대, 일본의 가계와 기업은 빌린 돈으로 주식, 부동산 등 자산을 대거 매입해 그 가격을 엄청난 수준으로 부풀렸다. 그러나 ‘거품 폭발’로 자산 가격이 폭락해버린다. 빚은 그대로 남았다. 가계와 기업은 해당 자산을 팔아도 부채를 온전히 상환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빌린 돈을 갚느라 소비(가계)와 투자(기업)에서 손을 뗐다. 이로 인한 수요(소비와 투자) 감소로 물가(노동력의 가격인 임금 포함)는 정체되거나 심지어 떨어졌다. 1990년대 초반부터 아베 신조가 총리로 취임한 2013년까지 인플레이션은 –2%에서 0.5% 사이를 오갔다. 인플레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물가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임금인상률은 1% 이하로 내려가더니 1990년대 후반부터 2013년 사이엔 마이너스가 아닌 분기가 오히려 드물었다. 경제성장도 둔화되었다.

기업이 많이 투자해서(노동력 고용 및 생산재 매입) 많이 만들고, 그 과정에서 많은 소득을 올린 가계(노동자)의 높은 유효수요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며, 노동자들은 물가가 오른 만큼의 임금인상을 요구하고(물가-임금 선순환), 이런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생산·소비가 더 늘어나는(경제성장) 역동적 과정이 사라졌다.

결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 기준금리를 낮추거나(통화정책), 정부의 돈을 민간에 투입(재정정책)하는 방식으로 소비·투자를 늘려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을 복귀시킬 수 있다. 이로써 경제가 활성화되면 세입 또한 증가하므로 정부부채도 관리할 수 있다. 실패하면 정부부채가 폭증할지도 모른다. 2019년 당시까지 일본 정부의 정책들은 ‘아주 성공적으로 디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한 것 같다. 일본 경제의 특성은 낮은 성장률, 엄청난 규모의 정부부채, 초저금리에도 꿈쩍하지 않는 물가 등으로 간주되었다.

디플레이션이라 불리는 이 현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하려면 한국과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추이를 보면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1990년 일본의 1인당 GDP는 2만5700달러였다. 한국은 6600달러에 불과했다. 30여 년이 지난 2022년,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2400달러로 4배 정도 팽창했다. 일본은 3만4000달러로 32% 증가(그것도 명목 기준으로)에 머물렀다.

구로다 총재가 쏜 ‘총알 세 개’

2013년 4월4일 구로다 하루히코 당시 일본은행 총재가 첫 정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

사실 일본 역대 정부는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1990년대 하반기부터, 당시까진 서방 선진국들이 좀처럼 채택하지 않던, 낯선 비전통적(unconventional) 통화정책들까지 동원했다. 2013년 집권한 아베는 그 정책들을 더욱 전면화했다. 그것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면, 2019년 당시 키르케고르는 서방국가들의 일본화(Japanification)를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선도적으로 제시한 해법이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디플레이션에서 헤어나올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였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논문 발표로부터 4년6개월여 뒤인 2024년 3월19일, 일본은행은 팡파르를 울린다. 2% 이상의 인플레이션율이 2022년 4월부터 지난 2월까지 22개월 동안 연속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일본은행은 오랜 세월 이어진 외로운 싸움에서 드디어 승리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사용한 무기들(비전통적 통화정책)은 버려도 좋다. 이날,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기준금리’ ‘수익률곡선통제(YCC)’ ‘질적완화’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들을 폐기하고 “정상적(normal) 통화정책”으로 복귀한다고 선언했다.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과의 30년 전쟁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선포였다.

디플레이션 탈출의 분기점은 2013년 아베 신조의 집권이었다. 아베 당시 총리는 이른바 ‘세 가지 화살(대규모 정부지출, 급진적 통화정책, 구조개혁)’로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급진적 통화정책을 실행할 전사로는 아시아개발은행 총재 출신인 구로다 하루히코를 2013년 3월 임명했다. 구로다 총재는 ‘디플레이션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2년 내에 인플레이션율을 연 2%로 올리”기 위해 “경기부양책을 바주카포처럼 쏟아내겠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비전통적 통화정책이 2013년에 비로소 시행된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1999년에 기준금리를 0%로 내렸다. 그러나 집 나간 인플레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0%인 기준금리를 더 내릴 수는 없으니 2001~2006년엔 비전통적 통화정책인 양적완화(QE)를 시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초다. 기준금리 인하든 양적완화든 해당 사회의 ‘차입비용’을 낮춰 경기를 살리려는 정책이다. 기준금리를 더 낮출 수는 없으니 양적완화를 채택했다고 보면 된다.

정부지출도 크게 늘렸다. 일본의 ‘GDP 대비 일반정부부채 비율’은 1990년 67%에서 1997년 100.5%, 2010년 205.7%, 아베 정부가 출범한 2013년엔 229.6%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토록 차입비용을 낮추고 재정을 퍼부어도 빈사 상태에 빠진 일본 경제는 2013년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로다 총재가 취임한 2013년 3월의 인플레율은 -0.9%였다. 그는 어떤 바주카포를 준비하고 있었을까? 대규모 양적완화와 질적완화(Qualititive Easing)를 꺼내 들었다. 양적완화에서 중앙은행이 사들이는 것은 국채 등 비교적 안전자산(가격변동이 크지 않은 증권)이다. 이에 비해, 질적완화로 일본은행이 대량매입한 증권은 상장지수펀드(ETF·시가총액 상위 기업들의 주식을 모아서 만든 펀드)와 부동산투자신탁(REITs·부동산에 투자하고 이에서 나오는 임대료 등 수익금을 배분하는 펀드)이었다. 중앙은행이 민간의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에서 투자자 노릇을 하며 이 부문 경기를 부양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양적·질적 완화(QQE)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율은 다음 해(2015년) 하반기쯤엔 마이너스 영역으로 떨어지고 만다.

구로다는 좌절하지 않았다. 일본은행은 2016년 들어 다시 바주카포 두 대를 배치했다. 하나는 기준금리를 0% 미만인 –0.1%로 내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익률곡선통제(YCC)다.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장기 차입비용)’이 0%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억제하는 정책이다.

구로다의 일본은행은 양적·질적 완화, 마이너스 금리, 수익률곡선통제라는 세 가지 ‘비전통적 총알’로 인플레율을 높이고 경제성장을 일본으로 복귀시키려 했다.

구로다는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아베 총리의 취임 전엔 거의 4년 동안 마이너스 영역에 잠겨 있던 인플레율이 드디어 플러스 영역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1%를 넘어서지 못했다. 당초 목표로 삼은 2% 인플레율은 아베 총리가 퇴임한 2020년 9월까지도 달성되지 않았다. ‘급진적 통화정책’ 이외에 아베 총리의 다른 화살들도 제각기 성과를 냈다. 〈이코노미스트〉(2020년 9월30일)에 따르면, “아베의 재임 기간 동안 경제는 전후 최고 기록에 불과 2개월 모자라는 71개월의 회복세를 보였다. 그리고 생산성은 미국보다 일본에서 더 빠르게 상승했다.”

그러나 아베가 퇴임하자마자 일본의 인플레율은 다시 마이너스 영역으로 빠졌다. 2020년 12월에 –1.2%로 바닥을 쳤다. 이듬해인 2021년엔 세계적으로 물가가 치솟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파괴된 상태였지만 수요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플레율은 1월에 1.4%였다가 12월엔 7%까지 치솟았다. 일본의 물가도 연초의 –0.7%에서 연말엔 0.8%로 올랐다.

일본의 물가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2022년 들어서다. 두 가지 외부 충격이 일본을 덮쳤다. 선진국들이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렸다. 같은 해 3월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식량과 에너지의 국제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2022년 한 해 동안 사실상 0%이던 기준금리를 4%대 중반까지 인상했다. 일본은 여전히 –0.1%였다. 일본과 다른 선진국 간에 금리 차이가 커졌다. 글로벌 유동성은 고금리 국가로 향한다. 일본에서 싸게 빌린 엔화를 고금리인 다른 나라 돈으로 바꿔 그 나라에 투자한다. 엔화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일본이 수입하는 상품의 국내 가격이 올라갔다. 전쟁 때문에 오른 식량과 에너지 가격이 엔저로 일본 소비자에겐 더 높은 부담을 안겼다. 그 덕분에(?) 일본의 인플레율은 2022년 4월 드디어 2%를 넘기더니(2.4%), 올해 2월까지 22개월 동안 줄곧 2%를 웃돌았다. 1990년대 초반 이후 처음이다.

물론 팬데믹, 전쟁, 금리 차이 등 외부 충격들이 쳐올린 인플레를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은행 측 관점은 다르다. 디플레이션의 원인 중 하나는 ‘물가는 원래 오르지 않는 것’이라는 대중심리다. 그랬던 일본인들이 ‘물가는 오르기도 한다’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알게 되면서 임금인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더욱이 일본의 GDP 성장률도 2020년의 -4.1%에서 2021년 2.6%, 2022년 1%, 2023년 1.9%로 올랐다. OECD 추산에서, 2023년 성장률이 전년도보다 높은 나라는 코스타리카, 미국, 일본밖에 없다. 엔화 절하에 따라 일본 대기업들의 수출 실적이 크게 증가한 덕분이다.

드디어 일본 경제가 정상화된 것일까? 아직 남은 퍼즐 조각이 있었다. 임금인상률이다. ‘정상적’ 경제에서는 물가가 오르면 임금도 따라 올라야 한다. 그래야 물가-임금 선순환과 경제성장이 가능하다. 2021년 10월 출범한 기시다 후미오 정부는 기업과 노조에 임금인상을 압박했다. 기업엔 세제 혜택, 노동자들에겐 가열찬 춘투(연초부터 봄 사이에 이뤄지는 임금협상)를 독려했다. 지난해 3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가 발표한 주요 기업 임금인상률은 평균 3.8%였다. 10년 만의 최고 수치다. 일본은행은 올해 3월의 렌고 발표를 주목했다. 인플레율과 성장률을 감안할 때 임금인상률만 높게 나온다면 일본 경제의 정상화 및 비전통적 통화정책의 종료를 선언할 수 있다. 지난 3월15일 렌고는 평균 인상률을 5.28%로 발표했다. 33년 만의 최고 기록이다.

2% 인플레, 안착할까

일본은행은 3월19일 기준금리를 –0.1%(정확하게는 –0.1~0%)에서 0~0.1%로 0.1%포인트 높였다. 17년 만에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마이너스 금리는 8년 만에 끝냈다. YCC도 폐기하고, ETF와 REITs는 더 이상 매입하지 않는다. 지난해 2월 구로다 하루히코를 승계한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일본도 다른 나라들처럼 정상적(normal) 통화정책을 운영한다”라고 말했다.

3월19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을 열고 금리인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AFP PHOTO

그러나 당분간 일본은행이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긴축(금리인상 등)으로 틀 것 같진 않다. 일본은행은 3월19일 성명서에서 국채 매입(사실상의 양적완화)을 “(최근까지와) 대체로 동일한 규모(매월 6조 엔)”로 계속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록 기준금리를 올리긴 했으나 양적완화의 지속으로 차입비용 전반의 상승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시장 상황을 보면, 기준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엔화는 여전히 달러 대비 약세이며 국채수익률 역시 큰 변동이 없다.

일본은행이 의도했을 터이다. 아직 회복세가 약한 일본 경제는 차입비용 인상을 버티기 힘들다. 더욱이 차입비용 상승은 엔화 가치 절상으로 이어질 것인데, 이 경우 대기업들의 수출실적이 줄어든다. 수입품 가격이 내려가 모처럼의 인플레이션이 지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본 주식에 대한 ‘사자 열풍’도 꺾일 것이다. 엔화 가치 절상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겐 ‘달러 기준으로 더 비싼 일본 주식’을 의미한다.

일본의 차입비용 상승은 글로벌 금융시장의 지각변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동안 일본 기업과 가계는 자국 내의 수익률(차입비용)이 너무 낮기 때문에 해외에 투자해왔다. 일본 기업과 가계의 대외순자산(‘일본인이 해외에 빌려주거나 투자한 돈’ - ‘외국인이 일본에 빌려주거나 투자한 돈’)은 세계 1위로 3조~4조 달러에 달한다. 만약 일본 내의 차입비용(금리)이 상승하면, 일본인들이 해외에 투자했던 돈을 자국으로 들여오면서 글로벌 자금 흐름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우려되는 사태는 일본의 인플레가 다시 떨어지는 것이다. ‘일본화’를 우려해온 세계 각국은 이 나라가 유례없이 과격한 시도를 통해 모처럼 실현한 ‘정상적 경제 시스템’이 그대로 안착할 수 있을지, 당분간 마음을 졸이며 일본 당국의 인플레 발표를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일본화’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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