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윤 대통령과 친윤은 8년전 총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윤태곤 정치칼럼니스트 2024. 4. 17.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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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새누리당 패배 때도
박근혜정부·여당은 쇄신 다짐
하지만 5월 혁신위 좌절부터
8월 이정현 대표 출범까지
청와대·친박은 일사불란했다
그 세달이 운명을 결정지어
이후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16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뉴스1

8년 전 20대 총선에서도 여당인 새누리당이 졌다. 122석을 얻어 1석 차이로 민주당에 1당 자리를 내줬다. 여소야대이긴 했지만 새누리당은 수도권에서 35석을 얻었고 전남과 전북에서도 의미 있는 1석씩을 차지했다. 전체 108석, 수도권 19석을 차지하는 데 그친 이번 국민의힘 성적표에 비하면 양호했다.

그래도 당시엔 충격이 컸다. 야당이 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전면적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선거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콘크리트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던 박근혜 대통령이 이끌던 여당이 참패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조(前兆)는 차고 넘쳤다. 여당에 대한 청와대의 일상적 개입이 도를 넘었고 공천 과정에선 ‘진박(眞朴) 감별사’들이 횡행했고 급기야 당대표가 공천장 날인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총선 패배 자체가 탄핵으로 귀결된 박근혜 정부의 처절한 몰락을 가져온 건 아니다. ‘패배 이후’가 진짜 문제였다.

그로부터 4년 전 19대 총선에 비해 30석을 잃은 대패였지만 원내 친박 비중은 오히려 높아졌다. 이른바 공천 학살과 영남권의 대승 덕이었다. 어쨌든 쇄신 압박이 강해서 당선자들은 새 원내대표로 충청권 비박 정진석을 원내대표로 뽑았다. 그때가 5월이었다. 지도부가 공중분해 된 상황에서 임시로 당권을 쥔 정진석이 전당대회 때까지 비대위원장을 맡는 것이 합리적 수순으로 보였다. 혁신위를 별도 기구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정진석은 험지인 서울 양천을에서 3선에 성공한 까칠한 쇄신파 김용태를 혁신위원장으로 내정하면서 이혜훈, 김세연, 김영우 등 중도적 소장파를 비대위원으로 포진시켰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충청권과 영남권의 친박 초재선 20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편향된 시각으로 일부 계파에 앞장선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은 문제”라며 고춧가루를 뿌렸다(이들 중 상당수는 차곡차곡 선수를 쌓아 이제는 ‘친윤 중진’으로 불린다). 결국 김용태는 혁신위원장직을 사퇴했고 비대위 구성도 무산됐다. 대신 혁신비대위라는 조직이 생겨 친박계가 옹립한 경북 청도 출신 원로 법조인 김희옥이 위원장직을 맡았다. 김희옥은 69일을 ‘무난히’ 보냈다.

그러고 나서 정기국회를 앞둔 8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선 박근혜 정부에서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을 지낸 친박 중의 친박 이정현이 당대표로 선출됐다. 최고위원 경선에서도 네 자리 중 세 자리를 친박이 차지했다. 강성 친박으로 불리던 조원진과 이장우가 1위와 2위였다. 전대 기간에도 당 지지율이 점점 떨어졌지만 그럴수록 강성 친박의 비중이 높아진 덕이었다. 대표 선출 이틀 뒤 열린 청와대 오찬에서 대통령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당대표 이정현은 “새 지도부를 중심으로 여당은 박근혜 대통령께서 이끄시는 이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집권 세력의 일원으로 책무를 다하겠다. 당·정·청이 완전히 하나, 일체가 되고 동지가 돼서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제대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당이 그렇게 재편되는 동안 청와대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이병기 비서실장이 사퇴하고 원만한 인품의 소유자인 이원종이 들어왔지만 75세인 그는 우병우 민정수석, 김재원 정무수석, 안종범 정책수석 등 친박 핵심들에 둘러싸인 신세였다.

그해 9월 들어 정기국회를 앞두고 소문과 의혹이 무성하던 미르·K재단이 완전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당연히 야당과 언론의 압박이 거세졌지만 이정현을 비롯한 친박 의원들은 대통령 보위에만 몰두했다. 여론 파악은커녕 연달아 터져나오는 뉴스들을 제대로 따라잡지도 못하고 우병우와 김재원의 입만 바라봤다. 여당 대표 이정현은 국정감사를 보이콧하고 본인이 직접 단식에 돌입했지만, 여당의 국회 파업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민심만 더 싸늘하게 만들었다. 10월 들어선 최순실의 이름이 나왔고 결국 이원종 실장과 우병우 수석 등 청와대 주요 참모들이 쫓겨나듯 한꺼번에 사퇴했다. 그때부터 청와대와 여당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그해 5월 정진석 비대위의 좌절에서부터 8월 이정현 대표 선출까지 걸린 시간은 세 달이 채 안 된다. 청와대의 지휘와 친박계의 일사불란함이 만든 그 세 달이 박근혜 정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때로부터 8년이 흐른 2024년, 윤 대통령과 친윤계 앞에도 존망을 정할 같은 세 달이 주어져 있다. 의석은 더 적고 대통령 지지율은 더 낮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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