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세상을 잇고, 추억을 품다] 5. 전국 각지 사람 모이는 탄광촌 터미널

김우열 2024. 4. 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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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땅 달리던 버스, 그 안의 광부들 흑백추억으로…
황지정류장 시초 현 태백버스터미널
석탄산업 활성화 대중교통 정착 빨라
1963년 버스 11대 운영 전성기 증거
승객 대부분은 광부 인근 상가 북적
3시간 이상 배차 간격 하루 3~4회 운행
탑승 경쟁 치열 자리 선점 전쟁터 방불
장성광업소 폐광 앞 예전 활기 추억

탄광촌 터미널은 전국 각지 사람들이 모이는 ‘만남의 광장’이다. 성공을 좇는 사업가, 직장을 찾는 청춘,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소년가장, 결혼을 앞둔 부부,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등 저마다의 사연과 고민을 가진 이들로 1년 365일 늘 북적였다. ‘황금의 땅, 기회의 땅’ 태백은 전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할 수 있는 ‘꿈의 직장, 신의 직장’이었던 곳이었다. 고향을 등지고 어딘가로 떠난다는게 흔치 않던 시절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탄광촌 터미널은 특정 인물, 다시말해 훗날 광부가 돼 원주민이 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래서인지 여타 버스터미널과 달리 삶의 애환과 사연의 무게가 유독 묵직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왁자지껄한 탄광촌의 터미널로 돌아가 그대들을 만나본다.

▲현 태백버스터미널 사진출처=영암고속

■ 인구 포화에 탄생한 태백시

탄광전성기 시절 태백 인구는 최대 13만명에 달했다. 석탄산업 활성화로 버스와 기차 등 대중교통의 발전 및 정착이 여타 지역 보다 빨랐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광부들로 주거공간이 절대 부족, 하천 바닥에 목재 또는 철재로 만든 지지대로 주거공간을 넓힌 까치발 건축물이 탄생하기도 했다. 삼척군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쳐 태백시(1981년)가 됐다.

국내 최대 규모, 88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성광업소는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행탄광이다. 1936년 4월 삼척개발주식회사에서 삼척탄광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뒤 1950년 11월 1일 대한석탄공사 창립과 동시에 인수됐다. 장성광업소는 올해 6월말 문을 닫는다.

▲ 1980년대 황지시외버스 전용정류장 사진출처=영암고속

■ 탄광촌 터미널의 발자취

“걸어다니는 게 일상이었어요. 버스는 거의 없고, 개인 자가용은 아예 없었죠. 버스가 있다고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보니 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어요. 그래도 터미널은 사람 구경도 하고, 볼거리가 많아 최고의 놀이터였죠.”

최명식(64) 태백문화원장은 터미널을 이같이 회상했다. 지금의 태백시외버스터미널은 공식적으로 1972년 영암운수 황지정류장(구 터미널, 현 영프라자 건물)이 시초다. 1980년 황지시외버스 전용정류장(신 터미널, 현 버스터미널 내 안쪽 공장동), 1986년 태백버스정류장(현 버스터미널)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3년에는 버스 11대가 태백 도심을 달렸다. 196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삼동여객’이라는 버스회사가 있었다. 현재 신한은행 태백지점 인근에 터미널 공터가 남아있다.

대중교통이 생소한 시절 10대 가량의 버스가 다녔다는 사실만으로 태백의 위상과 존재감은 하늘을 찔렀다. 승객 대부분은 광부들이다. 얼마나 많은 광부들이 오고 갔는지 그들만으로도 터미널은 큰 장사가 됐다. 터미널 인근 상인들은 “주말, 휴일, 평일 언제나 인파로 가득했다”며 “빵집, 다방, 군밤·고구마 노점, 우산 장수 등 터미널에 가면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는데, 활기찬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최명식 태백문화원장은 “당시 버스가 귀하다보니 꿈의 차량이었다”며 “버스 보다는 기차가 활성화 됐고, 길이 좋아진 70년대 초반부터 버스문화가 조금씩 정착됐다”고 말했다.

▲ 1980년대 황지시외버스 전용정류장 사진출처=영암고속

■ 울퉁불퉁 비포장 달리는 행복 버스

“철암 갑니다. 장성도 거쳐 가요. 빨리 타세요. 다음 버스는 3시간 뒤 도착합니다.”

쩌렁쩌렁 확성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버스 기사와 조수가 승객을 태우기 위해 이곳저곳 발품을 팔며 행선지와 정류장 위치를 알려 호객행위를 한다. 비좁은 버스에 타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숨쉬기 힘들 정도지만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야만 출발했다. 버스에 사람을 구겨(?) 넣었다. 당시 버스는 마이크로버스와 제무시(GMC). 제무시는 트럭을 개조한 버스다. 1950년대 등장해 1960년대까지 운행한 제무시는 30~40명, 1960년대 초반부터 달린 마이크로버스는 25명 가량 탔다.

버스는 무조건 타야만 했다. 배차 간격이 긴데다 하루 3~4회 운행하기 때문에 놓치면 다음 대기까지 최소 3시간 이상 걸렸다. 대개 첫차는 오전 5시, 막차는 오후 6시다. 당시 노선은 황지~장성~하장성~구문소~나팔고개 앞~철암역에서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길이 좋지 않다보니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2시간 가까이 걸렸다. 도심을 이동할 땐 걷거나 버스, 타 지역으로 갈땐 버스로 기차역까지 이동한 뒤 기차를 탔다.

▲ 1986년 태백버스정류장 준공식

■ 명절, 장날, 학창시절의 추억

타지역에서 온 이들이 많아 고향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김 모(83)씨는 “버스를 타려던 사람들이 워낙 많다보니 저 멀리 버스가 보이면 아내와 함께 어린 자식은 품에 안고, 조금 큰 아이는 손을 잡고 무작정 뛰어 자리를 선점했다”며 “버스를 한번 놓치면 고향 가는길이 더 늦어지기 때문에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넘어지는 사고도 많았다”고 했다. 이어 “하루하루 고된 노동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황에서 고향은 큰 안식처”라며 “버스·기차비 등 돈이 만만치 않게 소요되기 때문에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한게 고향이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버스를 타고 전통시장을 쇼핑(?)하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황지동 토박이인 김종민(76) 씨는 “60년대 초·중반 학창시절, 구제품인 청바지를 너무 사고 싶어 돈을 아껴 모아 버스를 타고 철암시장에 간 적이 있다”며 “어린시절 장날에 버스 타고 놀러가자고 부모님을 항상 졸랐던 것 같다”고 했다.

▲ 현 태백버스터미널

집 근처에 학교가 모여있는 시절이 아니다보니 통학수단은 무조건 걷기였다. 황지에서 장성에 있는 태백기계공고까지 2시간 이상 걸어다녔다. 웃픈(웃긴데 슬픈) 이야기 중 학생들이 산길로 걸어다니다가 간첩으로 오인받아 군부대에 끌려가거나 실제로 총을 맞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터미널과 버스는 광부 인생의 첫 출발지이자 평생지기 동반자였다. 장성광업소가 6월말 문을 닫으면 ‘광부’라는 두글자는 영영 사라진다. 버스는 예전 그대로 정류장에서 광부들을 기다리는데, 버스를 탈 광부는 없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광부들의 늠름하고 환한 얼굴을 기억하고 싶은 요즘이다. 김우열

▲ 현 태백버스터미널 내 매점 사진출처=영암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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