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강원 노포 탐방] 71. 화천수예점

안의호 2024. 4. 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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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애환 감은 붉은 실 화천시장 추억을 잇다
새마을 운동 시절, 화천읍 자리 잡아
1970년 ‘화천수예점’ 인수 50년 운영
뜨개실 중심 남녀노소 찾는 만물상
어린이 장난감·이불 등 시대별 인기
4남매 키우며 젊은 시절 고군분투
노인대학서 뜨개질 솜씨 화제
“주민 급감에 시장 발길 줄어 걱정
며느리 물려준 가게 북적거리길”
▲ 화천수예점 이재선(사진 왼쪽) 대표와 시어머니인 방금녀 이전 대표

암흑의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참혹했던 6·25 동란까지 겪은 어르신들은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손사래를 먼저 치신다. 추억으로 되돌아봐도 아직 아프고 힘든 기억인데다 몸소 겪어보지 못한 요즘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공감을 얻어내기 힘들다는 것을 어르신들은 잘 알기 때문이다. 화천시장에서 50여년 동안 화천수예점을 운영하며 슬하에 4자녀를 제대로 키워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대학교수 아들을 둔 어머니로 유명한 방금녀(87·화천읍)씨도 기자가 여러번 방문한 끝에야 옛날이야기 주머니를 끄르셨다.

화천군 상서면 파포리가 고향인 방금녀 씨가 화천읍에 자리를 잡은 것은 전국적으로 가난을 딛고 다 같이 잘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이 막 시작 되던 무렵이었다.

친척이 운영하는 파포리 양조장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던 함경남도 함흥군 출신인 남편(김종규·2012년 작고)을 만나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슬하에 4명(1녀 3남)의 자식을 뒀지만 사람만 좋은(?) 남편은 가계에 별 보탬이 되지 않았다. 가난과 6·25전쟁 등으로 12살 때 함경도로 피난살이를 가며 초등과정만 겨우 마치는 등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설움을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 방 씨는 집옆에 닭장을 만들어 남편의 주류 납품처에 계란을 함께 공급하고 봄에 쌀 한 말을 빌려주고 가을에 한 말 반을 받는 장리쌀(1년 100가마 규모)도 놓는 등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러던 중 1970년 쯤 화천읍 소재 시장 상가 입구에 있던 화천수예점이 매물로 나오자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게를 인수했다. 방 씨가 인수하면서 가게 간판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전 사장까지의 이력을 합치면 화천수예점의 역사는 최소 60년 이상이 될 것이라는게 방 씨의 생각이다. 지난 2020년 몸이 아파 며느리 이재선(61)씨에게 가게를 물려줬기 때문에 방 씨가 가게를 운영한 것은 딱 반세기인 50년이다.

▲ 화천수예점 내부 전경

방 씨는 가게를 인수하면서 화천읍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화천시장 입구에 있던 가게가 잘 돼 4년여 만에 시장 중앙인 현 가게터로 상점을 옮기며 아이들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춘천시 효자동에 집을 구해 4남매를 모두 춘천으로 보냈다. 방 씨가 매주 2, 3일 춘천으로 가서 청소도 하고 반찬도 만들어 놓긴 했지만 당시 중3이던 맏딸 김정숙(67)씨가 각각 2년 터울인 세 동생을 모두 돌봤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모두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정년 퇴직해 강릉과 인천, 춘천에서 살고 있다.

방 씨가 인수한 가게는 이름은 수예점이지만 사실상 온갖 물건을 다 취급하는 잡화점이었다. 가게를 인수한 뒤 머리핀에서 브로치, 바늘쌈지까지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하나하나 들여놓다보니 가게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만물상이됐다.

물론 가게를 처음 운영하던 무렵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뜨개실이었기 때문에 가게 이름은 제값을 하기는 했다. 당시 뜨개실은 요즘과는 달리 타래로 들여왔기 때문에 가게에서 일일이 뜨개질하기 좋게 뭉치로 다시 감아야 했다. 팔리는 물량이 많다보니 남편의 손에 의존하게 되면서 남편도 자연스럽게 양조장 일을 그만두고 수예점으로 합류하게 됐다.

당시 타래실을 사던 손님들을 요즘은 노인대학에서 만나는데 이런저런 기술을 가르쳐주곤 했던 방 씨의 뜨개질 솜씨가 화제가 되기도 한단다. 겨울을 맞는 가족을 위한 스웨터와 목도리를 만들기 위해 뜨개실을 사러왔던 사람들이 지금도 가끔 단골이라며 가게에 들르기도 한다고 며느리 이재선씨가 곁에서 웃으며 말한다. 시어머니가 그만둔 뒤 한번도 가게에 온 적도 없는 사람이 단골이라고 말하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내 단골처럼 반가운 마음이 든단다.

지금도 가게 한쪽에 뜨개실을 갖추고 있지만 요즘에는 스웨터나 장갑, 목도리를 만드는 털실보다는 수세미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 개량실이 주로 팔린다.

가게를 잡화점처럼 운영했기 때문에 팔리는 물건도 시대를 탔다. 1970년대에 뜨개실을 중심으로 한 생활 잡화가 주로 팔렸지만 1980년대에는 어린이용 장난감이 인기를 끌었다. 당시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등 선물 시즌에는 포장을 하느라 밤을 새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말에는 지역의 학생들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안 팔리는 품목을 대폭 정리하고 이불을 새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불은 혼수품으로도 팔렸지만 농촌에서 일하는 외국인과 외지 근로자들이 늘어나면서 중저가 이불이 많이 팔렸다. 이불은 지난 2019년 코로나 전까지 수예점 최고의 효자상품이었다. 지금은 시장을 찾는 손님조차 없어 효자상품을 묻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됐다.

방 씨가 지금 가장 후회하는 일은 젊은 시절, 조금이라도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 서울 도매시장을 직접 찾아가 그 무거운 물건을 머리에 이고 나른 것. 그때의 고생 때문에 허리와 무릎이 망가져 지금은 병원에 어렵게 번 돈을 다 갖다 바치고 있다. 나이가 많아 수술도 못해 이젠 죽을 때까지 그 통증을 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왜 그렇게 억척을 떨었나 싶단다. 뒤늦었지만 방 씨는 현재 봉사활동도 하고, 노인대학에도 다니며 즐거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일주일에 몇 번씩 노인 일자리에도 참가해 용돈벌이를 한다.

화천에 있던 군부대가 없어지고 지역주민이 급격하게 줄면서 가게를 찾는 손님이 너무 없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어려운 시기에 가게를 넘겨 받은 며느리에게 예전처럼 넘치지는 않더라도 따분하지 않을 정도의 손님은 찾아 왔으면 하는 게 방금녀 씨의 남은 소원이다.

방 씨는 “이젠 시골사람들도 수예점에 들르기 보다는 인터넷으로 뜨개실을 사는 시대라 가게가 예전같아 질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며 “잘사는 농촌여건을 갖춰 화천주민이 다시 늘고 화천 시장만이라도 예전처럼 북적거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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