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지금 머무는 그곳에
이따금 주변에 안부를 전할 때면 제주에 사니까 어떤지 질문받곤 한다. 부럽다고 했고, 타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선택이 용기 있다고도 했다. 그럴 때면 어떻게 답해야 맞을지 고민되었다. 로스쿨 제도의 도입 이래 신규 교원 임용공고가 거의 나지 않아 온 세부 전공을 가진 난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가르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사실 다 좋았다. 도심 한복판이나 산골, 혹은 강가나 항구였어도 마찬가지로 기뻐하며 갔을 것이다. 그건 생계의 문제였지 선택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절했던 대상은 거주 조건보다는 일할 자리였다.
지역의 숨은 명소를 추천해달라 청할 때도 답하기 쉽지 않았다. 재래시장을 둘러보거나 맛 좋은 빵집에 찾아가는 정도야 혼자서 곧잘 해도 누가 먼저 제안하기 전에 스스로 나들이를 계획할 부지런함은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령 토요일 아침 눈 뜨니 날이 화창하다 하여 ‘김밥 싸서 시외버스 타고 목장 다녀올까’ 식의 설렘이 솟지 않는 것이다. 다시 드러누워 밀린 잠을 청할 따름이다. 하지만 한갓진 중산간에 자리 잡은 교정 안에서 어떤 장소를 좋아하는지는 제법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일과의 대부분을 거기서 보내니 말이다. 각별한 곳 중 하나가 ‘노천극장’이라 불리는 작고 낡은 무대 앞 잔디밭이다. 학생들이 한창 오가는 한낮엔 활기차서, 벤치에 걸터앉은 젊은 연인이 밀어를 속삭이는 한밤엔 달콤해서 좋았다. 해 쨍하면 반짝거려서, 비 오면 싱그러워서, 안개 내려앉으면 신비로워서 좋았다.
교내에 서식하는 다양한 식물을 관찰하는 취미도 생겼다. 그중 본관 뒤편의 큰 나무들이 특히 마음에 든다. 식물학적으론 활엽수라는 사실 말곤 아는 바 없으나 문학적으론 떡갈나무나 느티나무 같은 이름이 어울릴 법한 나무다. 연둣빛 새잎이 돋는 봄엔 청신하고 잎사귀 무성한 여름엔 싱그러우며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을엔 넉넉하다. 겨울 되어 가지가 앙상해지면 나름의 고아한 멋이 난다. 나란히 선 그들 가운데 두 번째 가로등 옆의 것이 ‘내 나무’다. 물론 학교 당국의 허락을 얻지 않았으니 내 나무임은 비밀이다.
눈보라 심하게 일던 겨울 아침이었다. 날아갈 것 같다 하면 과장이겠지 생각한 순간 테이크아웃 커피를 쥔 손이 휘청했다. 코트 소매에 묻은 커피를 털어내려다 발아래 살얼음을 밟고 꽈당 넘어졌다. 부끄러운 장면을 목격한 사람 없나 두리번거렸더니 저기 나무 한 그루가 ‘괜찮아?’ 묻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잔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고 여일하게 서 있었다. 나뭇가지가 푸른 핏줄 솟아난 곧고 단단한 팔목으로 변해 추위에 부르튼 손을 잡아 끌어올려 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그 나무는 내 나무가 되었다.
또 다른 각별한 장소는 원형운동장이다. 밤 되면 몹시 고요해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 외쳐보고 싶어진다. 임금 귀에 관한 기밀을 품고 있진 않으나 늦은 시각 종종 그곳을 걷는다. 축제 기간 아닌 평상시엔 작은 조명등 몇 개만 켜두어 캄캄하지만 의외로 무섭진 않다. 야간 농구 하거나 배드민턴 치는 이들이 늘 몇몇 있으니까. 짙은 어둠 때문에 별이 한층 또렷하여 맑은 날 고개 들면 머리 위에서 쨍그랑 소리 날 듯 반짝인다. 형님인 별들과 누님인 달, 어머니 대지와 그 품에 안긴 나.
아말피 해안도 피레네산맥도 심지어 오름도 아니고 고작 교정을 걸으며 대지 운운하다니 핀잔받을 법하다. 하지만 아말피나 피레네는 일생 동안 갈 계기를 마련하기 어려운 한편 노천극장 잔디밭과 본관 뒷길은 바로 곁에 있으니까. 또 이젠 지병으로 경사진 데선 몇 발짝 못 떼고 멈춰 서서 숨 고르기 해야 하지만 평평한 운동장은 여전히 걸을 수 있으니까. 도심 한복판이든 산골이든 강가든 항구든, 그대가 지금 머무는 그곳에도 당국은 모를 그대의 나무가, 그대만의 아말피와 피레네가 있었으면 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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