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홍콩 중심부에 우르르... 일요일엔 노숙을 자처하는 외국인 가사도우미

홍콩=김효선 기자 2024. 4. 1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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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일요일 오전 10시. 홍콩 센트럴역 E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갑자기 다른 나라로 순간 이동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광둥어와는 확연히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반경 5미터 안에만 하더라도 수백 명은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근처에 홍콩인이라고는 거리를 통제하는 경찰관 두어 명뿐이었다.

지난 14일 오전 홍콩 센트럴 역 앞에는 휴일을 보내기 위해 거리로 나온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정부들이 모여 있었다. /홍콩=김효선 기자

처음에는 패키지여행을 온 관광객들인가 했다. 그러나 박스를 깔고 앉아 음식을 먹기도 하고, 서로 옷가지를 교환하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그 생각마저도 깨버렸다. 심지어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이들도 있었다. 노숙인이라고 보기에는 행색도 말끔했고, 표정도 밝았다.

이들은 사실 홍콩에서 일하는 가정부다. 홍콩에서는 이들을 ‘헬퍼’(외국인 가사도우미)라고 부른다. 대부분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여성들이다. 홍콩은 맞벌이 부부들이 많아 헬퍼들이 주 6일 고용주 집에서 살면서 일한다. 일주일에 하루 이들에게 주어진 휴일은 집주인에게도 휴일이기 때문에 이들은 집주인 가족이 단란한 주말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집을 비워준다. 홍콩의 비싼 집값 때문에 따로 거처를 마련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일제히 홍콩 중심부로 모인다.

명품 매장들과 금융 센터가 즐비한 홍콩의 중심부에 수만 명의 헬퍼들이 상자를 깔고 앉아 있는 모습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헬퍼들은 루이뷔통과 샤넬 매장 앞 도로를 점령하기도 하고, IFC몰까지 이어진 육교 위에 자리 잡기도 했다. 센트럴역에서 페리 터미널까지 이동하는 지하차도는 헬퍼들로 가득 차서 집단 수용소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인근 공원에 모인 인원수까지 합치면 수만 명이 넘을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지난 14일 오전 홍콩 센트럴 역 앞에는 휴일을 보내기 위해 거리로 나온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정부들이 모여 있었다. /홍콩=김효선 기자

홍콩 정부에서도 이들이 도심에서 쉴 수 있도록 도로를 통제하는 등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한 경찰은 “헬퍼들이 일요일과 공휴일만 되면 이렇게 나와 있다”면서 “대부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여성들인데, 이들은 여기서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밤이 되면 다시 고용주의 집으로 돌아간다.

필리핀에서 왔다는 가정부 미라 씨는 일요일마다 길거리로 나오는 이 순간이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평일에는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일을 하고 좁은 방에서 잠만 겨우 잔다”면서 “일요일에는 여기서 고향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좋다”라고 했다.

통제된 도로 말고 바깥 도로 쪽에는 트럭들이 일렬로 서있고, 헬퍼들이 각자 가져온 짐 꾸러미를 실으려고 줄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옷가지와 생활용품 등을 박스에 포장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 익명을 요구한 30대 현지 운전사는 “헬퍼들이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짐이나 고향에 판매할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보낸다”라고 말했다.

홍콩 인구통계국 조사에 따르면 12세 이하 자녀가 있는 가구의 32.5%가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외국인 가정부다. 수요가 많아 현재 홍콩에 거주하는 외국인 가정부는 33만8000명이 넘을 것으로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추정했다.

주말마다 도심에서 이런 진풍경이 벌어지는 데는 홍콩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한몫했다. 홍콩의 외국인 가정부 최저 급여는 4870홍콩달러(약 86만원)로 한국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낮은 편이다. 이마저도 오른 건데 홍콩 정부는 지난해 9월 30일 이후 체결된 모든 가사도우미 고용 계약에 대해 최소 급여가 월 4870홍콩달러가 돼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급여 외에 고용주는 월 1236홍콩달러(약 22만원)의 식비를 제공하거나 식사를 무료로 제공해야 하며 표준 고용 계약은 2년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는 물가가 높기로 악명 높은 홍콩에서 주거지를 구하기엔 역부족이다. 때문에 홍콩에선 주말마다 노숙하는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꾸준히 사회 문제로 제기됐고, 특히 코로나19 기간 동안 격리할 곳이 없던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이 대거 거리로 몰려나오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지난 14일 오전 홍콩 센트럴 역 앞에는 휴일을 보내기 위해 거리로 나온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정부들이 모여 있었다. /홍콩=김효선 기자

고용주가 숙식을 제공하다 보니 가정부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도 종종 문제가 된다. 관련 법에 따르면 가정부는 독립적인 공간을 제공받아야 하지만, 창고와 같은 1평 남짓한 방에서 지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외국인 가정부는 계약 종료 후 2주 이내에 도시를 떠나야 한다. 물가에 비해 낮은 급여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가정부들도 많다고 알자지라는 전했다. 알자지라는 “한국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시범 사업은 저임금 이주 노동 시장을 뒤흔들 잠재력이 있다”면서 “얼마나 많은 가정부들이 한국으로 갈지는 불분명하지만,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취재한 결과 상당수가 한국행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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