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못 하고 혼란만…" 오락가락 소부장 R&D 정책의 부메랑
종잡을 수 없는 소부장 R&D 예산
소부장 산업에 관심 없는 尹 실책
수출규제 해제했는데 수입은 감소
R&D 예산 삭감에 소부장 직격탄
줄인 예산 다시 늘린다고 반길까
진짜 카르텔 개선할 기회만 날려
지난해 윤석열 정부는 연구개발(R&D) 예산을 확 줄였다. 그 바람에 소부장(소재ㆍ부품ㆍ장비) R&D 예산도 함께 쪼그라들었다. 그중 소부장 특별회계 예산은 전년보다 84.6%나 줄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다시 소부장 R&D 예산을 늘리고 있다. R&D 예산 삭감에 따른 반발이 커지자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오락가락 R&D' 정책이 시장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반도체 메가클러스터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올해 1500억원 이상의 규모로 반도체 소부장(소재ㆍ부품ㆍ장비) 기술개발(R&D)을 지원한다. 3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펀드도 본격 집행한다." 지난 3월 5일 산업부 1차관과 과기부 1차관이 함께 반도체 장비기업 '테스'를 방문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3일 소부장 경쟁력강화위원회(위원장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는 정부서울청사에서 올해 첫 회의를 개최하고, 관계부처 합동으로 '제2기 소부장 특화단지 맞춤형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이날 위원회는 "2023년 7월 지정한 '제2기 소부장 특화단지'에 6조7000억원의 투자가 적기에 이뤄지도록 2318억원의 소부장 특화단지 R&D 투자를 포함해 향후 5년간 총 5067억원 규모의 맞춤형 지원을 할 것"이라는 계획을 내놨다.
소부장 산업 R&D 예산을 늘리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시그널이다. 사실 소부장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2001년 '소재ㆍ부품ㆍ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및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소재부품장비산업법)'을 제정한 이후 정부 차원의 지원은 꾸준히 이뤄져왔다. 특히 2019년 일본이 대한對韓 반도체 소재 수출을 규제한 것을 계기로 지원 사업이 좀 더 활발해졌다.
중요한 건 윤석열 정부가 그동안 소부장 산업 R&D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냐는 거다. 아쉽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사례들이 있다. 먼저 일본 정책을 보자. 윤 정부는 지난해 3월 '반도체 핵심소재의 한국 수출을 막은' 일본의 규제를 풀겠다면서 우리나라가 맞대응 차원에서 제기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했다.
굴욕외교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윤 정부는 '일본이 대한 수출규제를 풀어주는 게 더 큰 이득'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말대로라면 수출규제에 묶여있던 반도체 제조용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대일對日 수입량이 늘었어야 한다.
하지만 불화수소 수입량만 늘었을 뿐, 포토레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전년보다 더 줄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답은 일본이 '대한 수출규제'를 제대로 풀지 않았거나 이 분야의 국산화가 상당히 이뤄졌거나 둘 중 하나다. 업계에선 국산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윤 정부가 '소부장 산업'의 R&D 수준을 꿰뚫고 있었다면, 일본의 수출규제를 푸는 데 집착하지 않았을 수 있다. 좀 더 풀어 설명하면, '소부장 산업'을 향한 윤 정부의 관심이 덜했다는 방증이다.
사례는 또 있다. 정부의 소부장 산업 R&D 지원 사업 중엔 '전략핵심소재자립화 기술개발사업'이 있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주력산업에 쓰이는 소재 중에서도 대외의존도가 높은 첨단소재 일부를 자립화하기 위해 정부가 2020년부터 추진한 사업이다.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수송기기, 전자ㆍ전기, 기능성화학, 기계금속 5개 분야에서 총 40개의 핵심소재를 자립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투입하는 총 사업비만 1조4723억원(국비 9897억원+민간 4826억원)에 달한다. 계획대로라면 사업 5년차인 올해 1842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윤석열 대통령이 'R&D 예산 재검토'를 지시한 후, 올해 전체 R&D 예산안은 전년 대비 16.6% 줄었다. 전략핵심소재자립화 기술개발사업 예산도 1189억원으로 계획보다 35.5%나 쪼그라들었다. 연속성을 가져야 하는 세부 사업의 활력도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R&D 예산 삭감 소식과 함께 소부장 산업 R&D 지원 사업의 타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쏟아진 것도 그래서다.[※참고: 이와 별도로 소부장 R&D를 위해 책정해온 소부장 특별회계 예산은 2022년 3538억원에서 2023년 2183억원으로 줄었고, 올해는 336억원으로 84.6% 더 빠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윤 정부의 미ㆍ일 중심의 외교정책 기조는 소부장 산업 자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운영하는 소부장 종합포털인 소부장넷이 지난 2월 발표한 '2024 소재ㆍ부품ㆍ장비 산업 무역통계 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소부장 산업 무역수지는 902억 달러로 전년(1098억 달러)보다 17.9% 감소했다.
대중對中 소부장 수출 감소로 중국 관련 무역수지가 254억 달러에서 101억 달러로 절반 이상 줄어든 영향이 컸다. 중국의 경제회복이 부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윤 정부의 미ㆍ일 중심 외교가 중국을 자극한 탓이란 지적도 있다.
"정부가 소부장 산업에 도움을 주긴커녕 갑작스러운 R&D 예산 삭감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다가 느닷없이 관련 예산을 늘리겠다고 나선 이유가 뭐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여론의 비판에 떠밀려 다시 늘리고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 얼마 전 끝난 4ㆍ10 총선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다만, 윤 정부의 '오락가락 R&D 방침'이 시장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박상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는 "사실 산업계의 'R&D 나눠 먹기' 관행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윤 정부가 이 문제를 풀겠다고 한 건 R&D 지원 효과를 재고할 수 있는 기회였다"면서 "하지만 아무런 사회적 논의나 대책도 없이 'R&D 카르텔' 운운하면서 예산을 삭감하고, 비판에 밀려 예산을 다시 늘린 탓에 'R&D 나눠 먹기'를 개혁할 수 있는 기회만 날렸다"고 꼬집었다. '소부장 R&D'를 다시 늘리기로 결정한 만큼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과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단 일침이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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