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가 1개면 털어 쓴 이 나무 교체 움직임 [김민철의 꽃이야기]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30일자에 ‘한국, 제국주의 없는 벚꽃 구해(Wanted in South Korea: Imperialism-Free Cherry Blossoms)’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1면부터 시작해 5면 전체를 할애한 대형 기사였습니다. 한일 양국 간 오랜 벚꽃 논쟁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일고 있는 왕벚나무 교체 움직임을 조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100년 원조 논쟁했는데 다른 종으로 밝혀져
우리나라 도심에 흔한 화려한 벚나무는 대부분 왕벚나무입니다. 이 왕벚나무 원산지를 놓고 우리나라와 일본이 지난 100년 이상 논쟁을 벌였습니다. 일본은 왕벚나무가 자국 원산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1908년 제주도 한라산 자락에서 왕벚나무 자생지가 발견됐습니다. 그 후 일부 한국 학자들은 왕벚나무가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일본 학자들은 수백 년 전부터 일본에서 자생하고 있었다고 반박했습니다.
참고로 왕벚나무와 제주왕벚나무는 외관상으로 매우 유사합니다. 제주왕벚나무 겨울눈엔 털이 적은 반면, 그냥 왕벚나무 겨울눈엔 빽빽하게 나 있는 정도가 다릅니다. 꽃이나 잎, 수피로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그런데 2018년 국립수목원 주도로 유전자 분석을 한 결과, 제주도와 일본의 왕벚나무는 다른 종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제주도 왕벚나무는 올벚나무를 모계(母系)로 하고 벚나무 또는 산벚나무가 부계(父系)인 자연 교잡종인 반면, 일본 왕벚나무는 모계가 올벚나무임은 같지만 부계가 일본 고유종인 왜벚나무인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한일 간 110년 왕벚나무 원조 논쟁은 이렇게 좀 싱겁게 끝났습니다.
원조 논쟁은 끝났지만 많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심은 왕벚나무 대부분은 일본 원산의 왕벚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제주왕벚나무 자생지인 제주도에서조차 가로수로 심은 나무 대부분이 일본 원산 왕벚나무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왕벚프로젝트 2050′라는 단체는 2050년까지 전국의 공원과 공공시설은 물론 가로수용으로 심은 일본 원산 벚나무를 제주 왕벚나무로 대체하자는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다 베어내고 새로 심자는 것은 아니고 왕벚나무의 수령이 60년 정도인데, 수령이 다한 나무를 교체할 때 제주왕벚나무를 심자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2050년쯤에는 자연스럽게 국내 벚꽃 명소들에 국산 제주왕벚나무가 주류를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신준환 전 국립수목원장, 현진오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장 등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가 2022년부터 올해까지 여의도, 진해, 경주 등 벚꽃으로 유명한 곳의 벚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일본 왕벚나무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 경주 시내 벚나무 5576그루를 조사해보니 일본 원산 왕벚나무가 88.9%였고, 한국과 일본에 모두 분포하는 벚나무, 잔털벚나무 등이 조금 섞여 있는 정도였습니다. 제주왕벚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습니다. 현 소장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궁극적으로 소메이요시노벚나무(일본 왕벚나무)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다”며 “그러나 (국회·현충원, 현충사 등과 같이) 상징적인 장소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우리 왕벚나무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신 전 원장은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과 일본의 나무를 모두 즐길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며 “지금은 그 구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상황이 일방적(one-sided)”이라고 했습니다. ‘일방적’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나라 벚나무 150만여 그루 대부분이 일본 원산이고 우리 원산인 제주왕벚나무는 이제 막 가로수 등으로 심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여의도·제주 왕벚나무 점차 토종으로 교체키로
뉴욕타임스가 한일간 벚꽃 논쟁에 대해 1면부터 시작해 5면 전체를 할애해 소개하는 것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우리로 치면 영국과 프랑스 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특정한 꽃을 두고 원조 논쟁을 벌이다 교체 움직임이 있다는 정도일 것 같은데 대대적으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를 포함해 한일 양국의 기자 4명이 한미일 전문가를 인터뷰하고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또 서울 상주 기자가 ‘왕벚프로젝트 2050′ 관계자들이 경주에서 벚나무 종류를 조사하는 현장, 제천에서 우리 왕벚나무 묘목을 기르는 현장 등까지 담았습니다.
이 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문화적인 세련미(cultural refinement)를 주기위해 심기 시작한 왕벚나무가 지금까지 한국에 내려왔다”는 전문가 멘트를 달았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가로수 벚나무를 일제의 잔재로 보는 시각이 있다는 애기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움직임에 한국의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보인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와 (나무의) 유전적 진화(nationalist propaganda and genetic evolution)에 얽혀 있는 문제”라면서 “왕벚나무는 언제나 식민주의 정치와 얽혀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쪽 반응도 담았습니다. 일본의 두 수목 전문가는 일본 왕벚나무를 교체하려는 한국의 노력을 존중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일본벚꽃협회 사무총장은 “벚나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며 “사람들이 어떻게 벚나무를 보고 관리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한일간 예민한 문제여서 그런지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일본 원산 왕벚나무를 제주왕벚나무로 바꾸자는 주장은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 영등포구는 얼마전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여의도 벚꽃길 벚나무를 교체할 때 점차 제주왕벚나무로 교체하겠다고 했습니다. 여의도 일대에 있는 왕벚나무는 총 1365그루인데 매년 고사, 병충해 피해 등으로 50여 그루를 교체한다고 합니다. 이 교체 과정에서 왕벚나무 대신 제주왕벚나무를 심겠다는 것입니다.
현재 제주왕벚나무를 일부라도 가로수로 심은 것으로 알려진 지자체는 제주시와 경주시 정도입니다. 제주시는 시내 가로수 등을 교체할 때 한라생태숲에서 기른 제주왕벚나무를 쓰고 있고, 경주시는 2021년 제주 에밀타케식물연구소에서 제주왕벚나무 묘목 200여 본을 기증받아 가로수길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저는 점차 제주왕벚나무로 교체하는 것은 맞지만 서두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무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제주왕벚나무 묘목 생산이 더딘데다 가로수로 심을만한 나무(직경 15㎝ 이상)로 키우는데 7~10년이 걸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징적인 곳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교체하는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련 글
-[김민철의 꽃이야기] 한·일 왕벚나무 원조 논쟁 110년만에 결론, 그 이후...
-[김민철의 꽃이야기] 벚나무·왕벚나무에서 겹벚꽃·수양벚꽃까지
김민철의 꽃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4750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덮개공원 반대” 환경 규제로 한강변 재건축 추진 제동
- NYT, 안성재 셰프 재조명...“이라크 파병, 접시닦이 거쳐 고국서 꿈 실현”
- 집회지역 이탈, 경찰과 충돌... 집시법 위반해도 속수무책
- 헌법재판관 후보자들, 헌재 공백 막을 제도 개선에 한목소리
- 흡연율은 정선, 음주율은 서울 중랑구, 아침밥 먹기는 부산 1위
- [만물상] 사랑의열매
- 남자 배구 KB, 한전 꺾고 2연승
- 우크라, 드론으로 최전선서 1000㎞ 떨어진 러 카잔 공격
- 경찰, 尹대통령 개인 휴대전화 통화 내역 확보
- 남태령 경찰차벽 철수… 트랙터 시위대 “대통령 관저로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