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1인칭 책읽기: 가만한 나날]

이민우 기자 2024. 4. 15. 18:3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택시드라이버와 「가만한 나날」
다른 것을 혐오하기 위해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폭력
혐오란 자기 파괴 형식의 일종이다. [사진=펙셀]

비가 내린 도시의 밤, 네온사인 불빛은 자동차에 맺혀 번진다. 흐르는 빛은 물감이 번지듯 창에 스며든다. 택시를 모는 사내의 눈동자는 불빛을 따라 좌에서 우로 흔들리고. 불면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사내는 택시를 운전하며 중얼거린다. "쓰레기는 밤에 쏟아져 나온다. 매춘부, 깡패, 남창, 게이, 마약중독자 등등, 인간 말종들이다. 언젠가 저런 쓰레기를 씻어내 버릴 비가 쏟아질 것이다."

22대 총선을 치른 날, 학생들과 함께 마틴 스코세이지가 1976년 연출한 영화 '택시드라이버'를 봤다. 굳이 총선을 염두에 두고 본 영화는 아니었다. 수업을 하기 위해 함께 감상할 영화를 준비했고 우연히 날짜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총선 개표날 이 작품을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방황하는 도시의 젊은이를 그린다. 주인공은 대통령 선거사무실에서 일하는 '썸녀'와 데이트를 하다가 관계를 망친다. 그런 연유로 주인공은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고 한다.

물론 암살은 성공하지 못한다. 애초에 방향성이 없는 분노였기에 그의 총구는 매춘굴의 포주들에게 향한다. 주인공은 결국 사람을 살해하고, 대통령 후보가 아닌 포주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사회적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영웅'이란 칭호를 받았지만 그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불면증을 겪고, 사랑했던 여성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선과 악의 모호성에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수업하기에 알맞은 영화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인물과 심리 때문이다. 어디선가 한번쯤 만나본 것 같은 주인공과 불면증의 묘사. 그리고 연애가 잘 풀리지 않았단 이유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차버린 여자를 대면하지 못하는 그의 심정까지. 사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사진 | 민음사 제공]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김세희 소설가의 소설 「가만한 나날」을 떠올리곤 한다. 작가의 소설집엔 연애, 취업, 결혼 등 사회 초년생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틴 스코세이지가 연출한 택시드라이버와 닮아있다. 소설은 영화처럼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을 그리지 않는다. 실질적이거나 물질적 폭력도 없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더 크고 은밀한 살인이 담겨 있다.

소설 「가만한 나날」의 주인공은 마케팅 회사의 신입사원이다. 바이럴 마케팅을 위해 주부인 척 연기하며 블로그를 운영한다. 그러던 어느날 쪽지를 하나 받는다. 가습기 살균제의 블로그 후기를 보고 그 제품을 샀다는 한 여성의 쪽지였다. "아이와 자신 모두 큰 장애를 입었다"라는 메시지였다.

그 쪽지에 담겨 있는 것은 분노도 증오도 아닌 순수한 걱정이었다. 주인공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주부라고 믿고 피해가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쪽지를 보낸 것이었다. 목에 호스를 연결하고 있는 사람의 사진을 보며 주인공은 수백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두 작품은 모두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시스템 안에서 개인이 갖는 폭력을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1976년에서 2015년이 되기까지 시간의 간극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폭력은 더 은밀해진다. 시스템은 언제나 폭력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관성이 있다.

매춘부, 게이, 마약중독자, 페미니스트, 인셀, 장애인, 빨갱이를 밀어버리자는 사람은 2024년에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보여주듯 이런 혐오는 자기혐오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해가는 이는 결국 자신을 갉아먹다 못해 타인을 해치려고 한다. 총선 시기에 난무한 수많은 혐오적 용어는 선거가 끝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휘두르는 폭력은 어쩌면 거울을 향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택시드라이버의 주인공은 베트남전 참전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님에도 수많은 이들이 잠을 자지 못하고 수많은 이들이 인터넷에서 자신이 쓴 글로 다른 시민의 일상을 흔들고, 혐오를 내뱉는 것은 전쟁과 같은 우리의 삶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선거가 끝난 밤, 네온사인 불빛은 창문에 맺혀 번진다. 흐르는 빛은 물감이 번지듯 창에 스며든다. 불면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유튜브로 SNS로 모여든다. 학생들과 나는 영화를 다 보고 영화 이야기를 했다. 오후 10시가 되기 전 수업은 끝났다. 하지만 선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수많은 택시드라이버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