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궁궐·왕릉의 석재는 어디서 왔을까…채석장 위치 확인됐다
경복궁 근정전은 수유동, 경회루 돌기둥은 삼청동, 광화문 홍예는 홍은동…
고문헌·현장조사로 석재 산지·재질 확인···“300명이 하루 반 경회루 돌기둥 끌고와“
궁궐과 왕릉, 종묘 등 조선시대 최고 건축물의 석재는 어디에서 캐냈을까.
조선왕조 으뜸궁궐(법궁·정궁)인 경복궁의 근정전에 쓰인 돌은 ‘조계’에서 채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의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일대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홍예(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반원형으로 만든 구조물) 석재는 서대문구 홍은동 옥천암 일대에서, 경복궁 경회루의 석주(돌 기둥) 48개는 종로구 삼청동·창신동과 노원구 불암산 일대에서 왔다.
덕수궁 석조전과 종묘의 정전·영녕전 석재는 북악산 ‘창의문(자하문) 밖’ 인근에서 각각 확보했다. 또 숙종의 능인 명릉은 북한산성 서문 밖인 ‘중흥동’, 영조의 원릉은 노원구 중계동 불암산 일대의 돌을 다듬어 사용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은 이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 ‘국역 조선시대 궁·능 宮·陵에 사용된 석재산지’를 15일 펴냈다. 보고서는 조선시대 궁궐·왕릉 등에 사용된 석재의 채석장, 수급 과정과 관련된 옛 문헌 자료를 집대성해 한글로 정리하고 있다. 또 문헌에 기록된 산지의 현장 조사와 재질 분석, 문헌상 지명의 현재 위치 등도 추정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은 “보고서는 <조선왕조실록>, <창경궁수리소의궤> 같이 각 궁궐 수리·복원과정을 자세하게 담은 의궤 31종, 왕릉 조성관련 의궤, 외규장각 의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 터베이스 등 문헌 79종, 564건의 기사를 토대로 분석했다”며 “보고서 내용은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돼 향후 석조 문화유산의 수리·복원 등에 활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보고서를 보면, 석재 산지는 크게 한양도성 내부와 서교(西郊), 동교(東郊) 등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원래 한양도성 내부, 특히 사대문 안에서는 풍수지리나 왕실용 자재 비축 등을 이유로 채석이 금지됐으나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에는 삼청동에서 채석한 사례가 확인됐다.
서교는 한양도성 서쪽 외곽으로 지명상 ‘창의문 밖’ ‘녹번’ ‘옥천암’ ‘응암’ 등인데 지금의 은평구 홍제동·홍은동·응암동·녹번동 일대다. 동교는 ‘노원’ ‘불암’ ‘우이’ ‘조계’ 등이 채석장이었는데 지금의 노원구 중계·상계동, 강북구 우이동·수유동 등으로 각각 불암산, 북한산 자락이다.
경복궁 근정전은 특별하게 ‘조계’의 석재만 사용했다. 보고서는 “조계는 현재 지명이 전하지 않지만 최근 ‘사릉 석물 채석장 터’라는 명칭으로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된 수유동 일대로 추정된다”며 “실제 채석한 흔적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종묘, 창덕궁 선원전 등에도 타지역 석재와 조계 지역의 석재가 함께 쓰였다. 지난해 복원 당시 광화문 앞 월대의 난간 석재는 불암산, 수락산에서 캐낸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의 삼청동에서 북악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 일대도 석재 산지로 경복궁 중건 당시 채석해 경회루 돌기둥(석주), 경복궁의 영추문·신무문 등의 홍예석으로 활용했다.
경복궁 중건과정을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 중 1865년 5월 26일자에는 ‘경회루 석주 1개를 삼청동에서 떠내어 묶은뒤 병사 300명을 데리고 하루 반 동안 끌어서 궁 안으로 가져왔다’ ‘경회루 석주는 48개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서 각 16개를 담당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당시 경복궁 중건에는 삼청동·홍은동은 물론 ‘영풍정’(종로구 창신동)·불암산 일대인 ‘노원’ 등 여러 곳에서 채석한 석재를 사용했다.
덕수궁 중화전은 지금의 불암산과 우이동 일대, 석조전은 창신동과 창의문 외곽 일대의 석재를 썼다. 광해군 당시 착공한 경인궁의 석재는 ‘창의문 밖’ 등에서 가져왔고, 인조반정(1623년)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경인궁 공사가 중단되자 인조 재위 때인 1633·1647년 창경궁·창덕궁 수리에는 아예 경인궁에 있던 석재를 사용해 정치적 의도가 확인된다.
종묘의 정전·영녕전 수리에는 불암산과 창의문 외곽의 돌이 수차례 사용됐다. 성곽의 보수 등에서도 숭례문(남대문)의 경우 숙종·영조대에는 지금의 녹번동 일대 석재가, 정조대의 흥인문(동대문) 수리에는 불암산 석재가 사용됐다. 왕릉 조성에도 다양한 지역의 석재가 쓰였다. 효종의 능인 영릉은 지금의 우이동, 현종의 숭릉은 불암산, 명성왕후의 홍릉은 강화도·우이동 일대 석재를 활용했다.
조선 왕조는 1395년(태조 4년) 경복궁을 창건하고 이후 역사적 상황에 따라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경희궁), 경운궁(덕수궁) 등을 지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건축 이후 임진왜란, 화재 등으로 수리와 중건을 반복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궁궐들은 대부분 훼손·철거되는 등 수모를 겪어야 했다. 따라서 1865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대대적인 복원공사였다.
조선 왕실의 사당으로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종묘의 관리도 중요했고, 각종 부속건물과 조각물 등의 왕릉도 500여년에 걸쳐 꾸준히 조성됐다. 왕·왕비의 무덤을 넘어 건축과 조경, 왕실문화, 통치체제 등 당대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는 조선 왕릉 40기는 그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조선은 궁궐과 종묘·왕릉 등 주요 건축물의 건립과 수리·복원에 막대한 석재가 필요했고, 석재의 공사와 수급은 임시조직인 도감이나 돌을 캐낸다는 의미의 부석소(浮石所)에서 담당했다. 또 석재 운반을 담당하는 수석소(輸石所), 책석과 돌 공사를 위한 각종 철물을 제작하는 노야소(爐冶所) 등을 운영했다. 여기에는 석재를 다루는 장인인 석수(石手)·석공(石工) 등이 동원됐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종묘에 사용된 석재 9961점의 비파괴 암석조사 분석결과 담홍색 화강암이 95% 이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됐다”며 “조선시대 석재 산지들에서 궁궐에 사용된 석재와 동일한 암석과 채석 흔적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보고서 ‘국역 조선시대 궁·능 宮·陵에 사용된 석재산지’는 국가유산 지식이음 누리집(https://portal.nrich.go.kr)에서 자유롭게 열람·활용이 가능하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노루 피하려다 차가 밭에 ‘쿵’···아이폰이 충격감지 자동신고
- 파격 노출 선보인 박지현 “내가 더 유명했어도 했을 작품”
- [종합] ‘케이티♥’ 송중기, 둘째 출산 소감 “예쁜 공주님 태어나”
- 명태균 “오세훈 측근 A씨로부터 돈받아” 주장…오 시장측 “전혀 사실무근” 강력 반발
- ‘대학 시국선언’ 참여 교수 3000여명···“대통령 즉각 하야하라”
- “23일 장외집회 때 ‘파란 옷’ 입지 마세요” 민주당 ‘특정색 금지령’ 왜?
- 동덕여대 “남녀공학 논의 중단”···학생들 “철회 아냐” 본관 점거 계속
- 홍준표 “이재명 망신주기 배임 기소…많이 묵었다 아이가”
- 국회 운영위, 대통령실 특활비 82억 ‘전액 삭감’···야당, 예산안 단독 처리
- 불법 추심 시달리다 숨진 성매매 여성…집결지 문제 외면한 정부의 ‘게으른’ 대책 [플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