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살 때 아버지가 납북… 사진 속 기억이 전부” [이우승의 이슈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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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례 통화 끝에 이성의 6·25전쟁 납북인사가족 협의회 이사장과 연결이 됐다.
"맞다. 2010년 3월 26일 6·25전쟁 납북 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에 대한 후속으로 (이를 기념하는) 상징 이런 것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협의회 내부에서) 있었다. 그 때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꽃말을 생각하다가 물망초가 그런 꽃말이 있어서 이것이 좋겠다고 해서 상징으로 정하고 디자인을 하고 상표등록도 했다. 이어 그해 6월 '6·25 납북 희생자 기억의 날' 행사에서 물망초 배지를 처음 만들어 배포했다" 물망초 배지를 배포할 당시에는 현 이미일 명예 이사장이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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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지났지만, 납북자 문제 해결 안 돼 비극”
6·25민간인 납북자 10만여명, 국군포로 8만2000여명 추정
“생사확인 안 돼 고통···‘힘들게 사느라 고생 많았다’ 위로의 말 듣고 싶어”
3차례 통화 끝에 이성의 6·25전쟁 납북인사가족 협의회 이사장과 연결이 됐다. 3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단 물망초 배지의 사연을 알아보다 몇 차례 통화를 거쳐 이 이사장과 연락이 됐다. 처음 통화를 시도한 계기는 물망초 배지의 사연을 담은 칼럼을 쓰기 위해서였다. 칼럼은 ‘물망초···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4월10일자 지면에 게재됐다.
이 이사장이 귀한 시간을 내어줘 전화 통화를 했지만 많은 내용을 칼럼에 담지는 못했다. 이 이사장과 통화 내용을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해 온라인 기사로 다시금 출고하기로 했다. 다음은 이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맞다. 2010년 3월 26일 6·25전쟁 납북 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에 대한 후속으로 (이를 기념하는) 상징 이런 것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협의회 내부에서) 있었다. 그 때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꽃말을 생각하다가 물망초가 그런 꽃말이 있어서 이것이 좋겠다고 해서 상징으로 정하고 디자인을 하고 상표등록도 했다. 이어 그해 6월 ‘6·25 납북 희생자 기억의 날’ 행사에서 물망초 배지를 처음 만들어 배포했다” 물망초 배지를 배포할 당시에는 현 이미일 명예 이사장이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국회의원에게 배지 착용을 요청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김무성 의원이 대표발의한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안’과 박선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한국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 두 건이 있었다. 이 두 건의 법률안이 국회에서 토론을 거친 뒤 단일 법안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후속으로 물망초 배지가 만들어졌는데, 일본에서는 ‘납북자 문제’를 상징하는 파란리본이 있고, 총리와 국회의원이 행사 때마다 단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박 의원에게 우리도 그런 행사 때마다 국회의원들이 달았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고, 그렇게 됐다”
“김영호 장관이 취임하고, “우리도 일본의 ‘파란리본’처럼 전 국민이, 그리고 국무위원이 달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상징을 만들어 홍보하고 확산하면 좋겠다는 취지로 통일부에서 추진했다. 여러 가지 안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동안에 등대도 나오고 새도 나오고 하면서 많은 디자인이 나왔지만, 우리 단체의 성격과 정서에 딱 와 닿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기왕에 우리가 물망초를 쓰고 있는데, 다시 만드는 것보다 우리 것을 써도 좋다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쓰던 물망초 배지에다가 새롭게 디자인을 보완해서 두 가지 정도의 상징 배지를 만들었다. 납북자와 억류자, 국군포로를 상징하는 세 송이가 ‘브이자’(V) 형태로 있는 것이 메인 배지고, 3개가 따로 붙어 있는 것도 있다”
―6·25때 납북된 민간인 수가 얼마나 되나.
“6·25 때 많은 민간인이 잡혀갔다는 사실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기 때문에 많이 모른다. 저의 나이 때 친구들도 잘 모른다. 6·25전쟁 당시 납북 인사들은 약 10만명 정도로 보고 있다. 전후 납북자들은 3000명 정도 되는데, 이 가운데 현재 516명이 북한에 있는 상황이다. 국군 포로는 8만2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안타깝다. (민간인 납북자의)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
―이산가족 상봉 때 시도하지 않았나.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에 이산가족 신청을 허락했다. 다만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했다. 신청은 가능했지만 북쪽에서는 ‘생사확인 불가’라는 답변으로 돌아왔다. 북쪽도 자료가 있을 것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산가족 명단에 이름이 올라 아버지를 만날 기대를 가지고 올라갔지만 삼촌의 부인(숙모)과 아이들만 만나고 온 경우도 있다. 당시 ‘아버지가 어떻게 됐는지’를 물어봤지만, 오히려 그쪽에서 ‘큰아버지가 (남쪽에서) 잘 있는지’를 물어봤다. 삼촌은 돌아가셨다는 답변을 들었다. 또 다른 지인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석해 남편을 만날 것을 기대했지만, 이틀 전에 갑작스럽게 연락이 와서 “북에는 그런 분이 없다”는 답변이 오기도 했다. 그분은 2, 3년 뒤 돌아가셨다”
“전쟁 납북자의 경우 전혀 소식을 알 수 없는 것이 답답하다. 그 점이 가장 어려운 상황이고 힘들다. 가족도 나이가 들어가고, 더 활동하기가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많이 돌아가셨다. 제가 1세대인데, 저보다 모두가 나이가 많다. 저희가 제일 젊은 세대이고, 마지막 남은 세대다. 대부분 80세가 넘고, 남은 분들이 별로 없다. 아버지가 전쟁 납북자이다. 내가 1948년생이다. 아버지를 봤지만, 기억이 없다. 우리 나이로 1살 반 정도 일 때 내가 1년 6개월 됐을 때 납북됐다. 사진으로 밖에는 (아버지의) 기억이 없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생사확인이나 돌아가셨다면 유해라도 돌려받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1의 목적이다. 70년이 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비극이다. 남북문제에 걸림돌이 된다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고 홀대받고 하는 서러움이 굉장히 많았다. 가족들에게 위로와 사과의 말이라도 듣고 싶다. 국가의 책무도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국가도 국가로서의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대통령이 국민 앞에 납북자 가족들에게 정말 책임을 못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라든지, 여태까지 힘들게 사시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위로의 말이라도 듣고 싶다”
이우승 기자 ws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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