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냐”…‘제2 나일론 전쟁’ 돌입한 효성·코오롱의 질긴 악연
[비즈니스 포커스]
섬유화학업계 라이벌인 효성과 코오롱이 미래 먹거리인 ‘하이브리드 타이어코드(HTC)’ 특허를 두고 국내외에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지난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지방법원에 효성첨단소재와 효성USA를 상대로 특허 침해 금지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HTC 관련 미국 특허 3건을 침해했다는 게 요지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현재 미국에서 HTC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 전기차 주요 시장인 북미 시장 주도권을 놓고 양사는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코오롱인더스트리 HTC는 아라미드 섬유와 나일론 섬유를 함께 꼬아서 만든 타이어코드 제품으로 특허에는 섬유의 꼬임수와 섬유 구조적 기술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코오롱인더스트리의 타이어코드 최대 수요처가 북미 시장이며 향후에도 집중해야 할 시장으로 해외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해당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고 소송 배경을 밝혔다.
이번엔 전기차 시장서 ‘정면충돌’
타이어코드는 타이어 형태를 유지하고 주행 시 타이어에 부여되는 하중과 충격을 견디는 역할을 하는 섬유 재질의 보강재다. 타이어의 내구성과 주행성능을 높이고 편안한 승차감을 느끼게 해주는 핵심 소재다.
전기차 등 친환경 자동차 보급 확대에 따라 기존 폴리에스터(PET) 타이어코드보다 지지력, 저소음, 내마모성이 뛰어나 초고성능 타이어에 적용 가능한 HTC가 차세대 제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400kg이 넘는 무거운 배터리가 탑재되는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30% 이상 무거워 전기차 무게를 버티기 위해선 가볍고 내구성이 우수한 고강도 타이어코드 소재가 필요하다.
또 전기차, 수소차 등 친환경차는 무게가 내연기관차보다 무거운만큼 내구성 강화를 위해 타이어코드를 10∼20% 더 사용한다. 이에 따라 전기차 시장 확대에 따라 HTC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타이어코드는 양사의 총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캐시카우’ 사업인 만큼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다. 업계에 따르면 타이어코드 매출 비중은 효성첨단소재는 60% 이상, 코오롱인더스트리는 30% 이상을 차지한다.
효성첨단소재와 코오롱인더스트리는 글로벌 시장에서 각각 51%, 15%의 점유율로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소송 결과에 따라 패소한 쪽은 시장점유율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내 특허소송에선 코오롱 승리
국내에서도 HTC 특허를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2022년 효성첨단소재는 2015년 코오롱인더스트리가 등록한 ‘하이브리드 섬유 코드 및 그 제조 방법’ 특허 무효심판을 제기한 바 있다. 타이어의 고성능화 및 경량화를 구현할 수 있는 고성능 하이브리드 타이어 코드 및 그 제조방법에 대한 특허다.
특허심판원은 지난 3월 이와 관련해 일부 기각 및 각하 결정을 내렸다. 효성첨단소재 관계자는 “특허심판 결과에 대해 항소를 검토 중이며 미국 소송에 대해서는 법률대리인을 통해 법적인 절차에 따라 적극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코오롱인더스트리 관계자도 “국내 특허심판원이 일부 기각 및 각하 결정을 내린 만큼 앞으로 효성의 특허법원 항소 여부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며 “이번 국내 판결로 인정받은 당사의 특허 유효성을 기반으로 미국에서의 특허침해 소송도 이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양사의 소송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효성과 코오롱은 국내 유일 카프로락탐(나일론 원료) 생산업체인 카프로의 경영권을 놓고 1996년,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법적 공방 직전까지 가는 다툼을 벌인 바 있다. 이른바 ‘나일론 전쟁’이다.
카프로는 1969년 정부가 나일론의 원재료인 카프로락탐의 생산과 공급을 위해 설립한 국영기업이다. 1974년 상장하는 과정에서 효성티앤씨와 코오롱인더스트리가 각각 지분 20.0%, 19.2%를 확보한 바 있다.
현재는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경쟁력을 잃고 자본잠식에 빠져 워크아웃 절차를 밟고 있지만 국내 카프로락탐 수요의 약 90% 이상을 독점 공급하며 2011년 매출 1조원, 영업이익 2100억원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던 때가 있었다. 카프로의 1·2대 주주였던 효성과 코오롱은 당시 카프로의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1996년 코오롱은 효성이 임직원 차명계좌로 주식을 매입해 카프로의 지분을 확보했다고 검찰에 고발하면서 고(故)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오랜 기간 수사를 받기도 했다. 양사는 카프로를 놓고 2004년 2차 경영권 분쟁을 벌였다.
조석래 명예회장과 이웅열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카프로의 경영권 문제 때문에 전격 회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측 총수가 전격 회동한 지 한 달 뒤 2차 경영권 분쟁이 터졌다. 카프로가 1988년 이후 16년 만에 첫 유상증자에 나섰고 효성은 당시 3대 주주였던 고려합섬의 카프로 지분 7.44%를 전량 인수해 유상증자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코오롱이 “효성이 1996년 코오롱, 효성, 고려합섬 3대 주주가 카프로의 지분 변동이 있을 때 사전 협의를 하기로 한 협약을 위반했다”며 즉각 반발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미국 소송 노림수는 ‘디스커버리 제도’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이번 특허소송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제기한 이유는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 때문인 것으로 파악된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의 당사자가 재판 전 단계에서 소송에 필요한 항목과 내용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정보나 증거를 공개하고 수집하는 제도다. 국내에선 아직 도입 논의 단계 수준이다.
이 제도는 재판절차 전 분쟁 당사자가 갖고 있는 증거를 공개하는 증거조사 방식이다. 소송 당사자들은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증거를 보존할 의무를 가진 당사자가 증거를 인멸, 은닉, 변조 등의 증거 훼손을 할 경우 패소 판결까지 가능하다. 이로써 법원의 심리 기간도 단축되고 재판 절차 역시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19년 4월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소송’을 냈을 때 한국 법원이 아닌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기했던 이유도 이 제도를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제도와 관련해 코오롱의 ‘학습효과’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증거 훼손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는데 코오롱은 2009년부터 6년간 듀폰과 아라미드 소재 제품인 헤라크론의 개발과 관련해 법적 다툼을 벌이면서 이 제도의 위력을 실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듀폰은 2009년 방탄·방한복 등에 쓰이는 고강도 섬유 아라미드 제조기술을 코오롱 측이 빼돌려 자사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며 미국 버지니아 연방지방법원 리치먼드 지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코오롱이 소송 증거자료로 요청한 이메일과 관련 자료 등을 폐기했다가 소송에 대비한 자료보전조치를 소홀히 한 점이 인정돼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실제 ‘배터리 분쟁’ 당시 LG에너지솔루션이 디스커버리 제도를 활용해 SK이노베이션의 조기 패소 판결을 이끌어냈고 분쟁을 조기에 결론 낼 수 있었다”며 “코오롱인더스트리도 이 제도를 활용해 조기 결론을 얻어 북미시장 공략에 집중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돋보기]
신사업 곳곳서 갈등…총수 일가 중재 나설까
라이벌인 효성과 코오롱은 폴리에스터에서 시작해 타이어코드, 필름, 수입차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혈전을 벌여왔다. 주력 사업에서도, 미래 먹거리 분야에서도 경쟁을 이어왔다. 하지만 양사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 서로의 존재가 큰 원동력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즈니스에서는 사사건건 부딪치며 대립각을 세웠지만 두 그룹 총수 일가의 관계는 끈끈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11월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효성그룹의 조현준 회장과 조현상 부회장이 이틀 연속 빈소를 찾아 눈길을 끌었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3월 29일 별세한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을 조문한 후 “저희 대선배이시고 항상 사랑을 많이 받았다”며 “우리 섬유계의 별이셨다”고 고인을 애도했다.
끊임없이 선두 경쟁을 하는 와중에도 2009년 조석래 명예회장과 이웅열 명예회장이 만나 중국의 화학섬유산업 급성장에 대응해 국내 화학섬유업계 리더로서 업계 발전과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과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오랜 시간 함께한 인연이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소송전이 격화할 경우 최종결정권을 가진 조현상 효성 부회장과 이규호 코오롱 부회장 등 양측 총수 일가가 중재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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