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에서 有 만든 할아버지의 삶… 지금 젊은이들에 희망 됐으면”
“돌아가시기 전까지 15년쯤 매주 이틀씩 시간을 정해 놓고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가면 ‘너 왜 일 안 하고 여기 왔어?’ 하시면서도 늘 저를 기다리셨죠. 남에게 못 할 이야기도 할아버지와 저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이였어요.”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1921~2020) 명예회장은 서릿발처럼 엄격한 카리스마의 기업가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세상이 기억하는 모습과 달리, 맏외손녀 장혜선(55)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게 외할아버지 신 회장은 “겉으론 늘 차가워 보였지만, 속마음은 정말 따뜻했던 분”이다. 그는 “내겐 할아버지가 ‘베프’(Best Friend)였고 할아버지도 그러셨을 것”이라고 했다.
장혜선 이사장은 내달 3~5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낭독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 ‘더 리더(The Reader & The Leader)’ 제작을 후원한다.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꿈꿨으며, 어려운 이웃을 위한 마음 씀씀이가 컸던 청년기 신 회장의 인간적 면모를 녹인 이야기. 최근 서울 소공동 롯데빌딩 롯데재단 집무실에서 만난 장 이사장은 “청년들이 희망을 갖기 어려워하는 시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던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위로와 힘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신 회장이 젊은 시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여인 ‘샤롯테’의 이름에서 그룹명을 지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 뮤지컬 역시 단순한 기업인 일대기가 아니라,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박목월의 ‘4월의 노래’ 등 여러 문학 작품에서 힘을 얻으며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한 청년의 삶 이야기로 풀어낼 예정이다. 젊은 시절 신 회장이 아꼈던 작품들이다.
손녀에게 기억 속 할아버지는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던 모습이다. “책 좀 그만 읽고 쉬시라고 하면 ‘읽어야 배울 수 있다’고 웃으셨죠. 돈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여행이라도 가시자 해도 ‘난 그냥 일이 너무 좋아’ 하셨고요.”
오랫동안 공개 행사에 나서지 않았던 그는 지난해 롯데 삼동복지재단과 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사회 공헌에 진심이었던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갈 재단 일만큼은 세상에 더 널리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뮤지컬 제작 후원도 그래서 결심한 일이다. 그는 “생전에 할아버지 이야기로 공연이 만들어진다고 말씀드렸다면 아마 ‘쓸 데없는 짓을 왜 했노’ 호통 치셨을 것”이라며 웃었다.
올해 롯데재단은 총 예산을 작년보다 30억원 많은 180억원으로 늘리고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국내 장학 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해외로도 활동을 넓히고 있다. 다문화가정과 외국인 근로자, 장애인 지원 사업도 다양해졌다.
“할아버지도 젊어서 일본에 간 외국인 근로자셨잖아요. 그 시절 한국인들은 분뇨 퍼 나르는 것 정도밖에 못 했다고, 그게 너무 싫어서 공장을 세워 한국 사람을 많이 고용하려 애썼다고 하셨죠. ‘남 돕는 일은 세상이 모르게 하라’던 그 말씀은 지키지 못하게 됐지만, 좋은 뜻이 더 널리 확산되길 바라는 손녀의 마음은 알아주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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