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칼럼]국정 3대 족쇄부터 尹 스스로 풀라
인적쇄신, 협치, 거국내각 등 해법 쏟아지지만
‘채상병-김여사-2000명’ 피하면 격화소양일뿐
‘새 취임사’ 쓰듯 심기일전 않으면 더 큰 위기
적지 않은 여권 지지층이 실망감, 우울감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득표율 격차는 5.4%포인트(157만여 표)에 불과한데, 민주당은 161석이나 얻고 국민의힘은 90석밖에 못 얻은 것은 억울하다는 식의 일부 극우 인사들 논리는 객관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주장이다. 지난 대선 0.73%포인트, 24만 여표 차 승리로 국가 권력을 장악한 게 국민의힘이다.
이번 총선에 대한 숱한 진단이 나와 있고 해법도 쏟아지고 있다. 대통령 참모들과 내각 인적 쇄신, 대통령 탈당과 중립내각 얘기도 나온다.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키워드는 소통과 협치다. 다 좋은 말들이고, 또 깊이 검토돼야 할 의제들이지만 공허함을 지울 수 없는 건 격화소양 느낌이 들어서다. 문제의 본질은 제쳐두고 아무리 인적 쇄신을 말해봐야 변화의 진심이 전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윤 대통령이 “겸허한 수용” “국정 쇄신”의 뜻을 밝혔지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란 반응이 적지 않다. 이런 냉소적 기류는 오만과 아집의 이미지가 일반인들에게 강하게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감정적 판단과는 별개로 좀 더 근원적인 우려는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느냐의 문제다.
다원적 사회, 특히 국정에 대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만천하에 공개되는 민주공화정의 리더는 과거 로마 시대의 집정관과는 역할이 질적으로 다르다. 권력자의 오만은 옳고 그름에 대한 독점 의식에서 비롯된다. 대통령이 “여론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내가 손해 보더라도 할 일은 한다”고 구체적 소신을 밝히는 것은 정책 결정의 경직성을 초래할 수 있다. ‘의대 증원 2000명’을 못 박는 발언을 대통령이 직접 내놓으면 참모건 장관이건 이를 뒷받침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의대 증원은 정책 이슈지만 해병대 채모 상병 사건이나 부인 김건희 여사 관련 각종 의혹에 대해 대통령이 방어적으로 나온 것도 군과 검찰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됐다. 자기 잘못이나 실책을 인정하는 순간 법적 불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검사 출신으로서의 ‘직업적 두려움’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연루된 문제에 대한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어서다.
윤 대통령이 이번 주 총선 패배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고 한다. 인적 쇄신도 중요하고 경제 민생 안정도 중요하고, 협치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분명한 건 윤 대통령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3개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내는 용기를 보이지 않고는 국민 마음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우선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한 족쇄다.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 국방장관의 결재 번복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장 잘 아는 당사자는 대통령 자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이 그날의 진실을 선제적으로 솔직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실제 대통령의 전화 질책이 있었는지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다만 해병대 사령관이 “말하지 못하는 고뇌만이 가득하다”는 지휘 서신을 장병들에게 보내는 현실 그 자체가 해병대 명예와 위상과 관련된 문제임은 분명하다.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문제, 디올백 논란도 방어벽만 칠 게 아니라 검찰이 공정하게 수사에 나설 수 있도록 족쇄를 풀어줘야 한다. 상대 대선후보 부인의 밥값 10만 원짜리 수사를 23개월 끌다가 공소시효 만료 하루 남겨 두고 기소한 것과 비교해 형평성 논란이 이는 건 당연하다. 나아가 의대 증원 2000명 족쇄도 풀고 전문가 위원회에 합리적 방안을 찾으라고 해야 한다.
야권의 압승은 또 다른 오만의 씨앗을 품고 있다. 심판은 돌고 돌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윤의 시간’이다. 보여주기 식 협치의 제스처가 아니라 ‘제2의 취임사’를 쓰듯 국정의 족쇄를 풀고 남은 3년 어떻게 국정을 펼칠 것인지에 대한 새출발의 다짐을 내보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 큰 위기가 올 수밖에 없을 텐데, 과연 윤 대통령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자칫 더 큰 논란과 혼란을 부르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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