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20년 드라마의 비극적 대단원
20년 전 바로 오늘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던 날이다. 소박한 교외 식당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숨죽이며 TV 화면을 지켜봤다. 출구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민주노동당 9~12석’이라는 뉴스가 화면에 등장했다. 다 함께 환호했다. 내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을 알고 있는 지인들의 축하 문자, 전화가 이어졌다. 내가 당선된 것도 아닌데! 민주노동당 당원이든 아니든,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반공이데올로기가 진보정당의 출현을 가로막았다. 어려운 시작 이후에도 민정당과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거대 양당의 치열한 접전 속에서, 진보정당은 매번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정책 공약도 ‘사표(死票)’ 우려 앞에서 번번이 힘을 잃었다. 그런데 17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1인 2표제가 도입되었다. 최소한 비례명부에서는 정치공학적인 고려 없이, 사표 걱정 없이 지지 정당에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비례명부에서 무려 270만표, 13%가 넘는 표를 얻었다. ‘노동자 도시’ 울산, 창원에서 당선된 지역구 의원 2명과 비례의원 8명, 처음으로 원내정당이자 제3당이 되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개표 막판에 일어났다. 10선 경력의 정치인 김종필이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선 자유민주연합이 정당 득표율 3%를 채우지 못하면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했고, 그 자리를 민주노동당 비례 8번이었던 고 노회찬 후보가 차지한 것이다. 역사의 한 장이 바뀌었다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순간은 없었다.
의원 수는 10명에 불과했지만, 민주노동당은 10인분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한국 사회 공론장의 금기어와도 같았던 ‘무상의료’ ‘무상교육’ 같은 단어들이 의회 공간에서, 대중 미디어에서 버젓이 거론되었다. 비록 입법에까지 이르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여러 민생법안들이 의회에서 진지하게 토론되고, 무상급식 제도나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등은 실제 정책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선거 때면 다른 당들이 공약을 베껴가기도 했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너무 출중하고 당의 정치력이 빼어나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목소리를 얻지 못했던 이들의 바람, 사회개혁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그만큼 컸다. 개혁적 성향의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전문가들도 이상(理想)을 현실 정책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함께 활동했다. 당 자체는 소수파라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지만, ‘거대한 소수’로 나아가기 위한 수많은 이들의 열망과 노력은 진심이었다.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것도 안 좋은 방향으로. 결국 최근 치러진 22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명맥을 이은 녹색정의당은 단 하나의 의석도 얻지 못했다. 더 이상 진보정당의 당원은 아니지만, 역사의 한 장이 20년 만에 이렇게 닫히는구나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이 단지 당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몰락 또한 온전히 녹색정의당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문하고 싶다. 20년 전 민주노동당을 지지했던 수많은 이들의 기대는 다 채워졌는가. 더 이상 진보정당이 필요 없을 만큼, 우리 사회의 공론장이 서민,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가. 사회 불평등이 완화되었는가. 미래세대와 지구생태계를 위한 녹색 정치가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진보정치의 역사적 소임은 유효하다. 물론 20년 전의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런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20년 동안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정치환경, 인구, 노동시장, 문화, 노동조합과 시민운동, 그 어느 것도 과거와 같지 않다.
자신의 잿더미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불새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폐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진보 정치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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