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짚신 선물까지 끝끝내 '값' 치른 그분처럼

이남석 발행인 2024. 4. 1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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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63
백의종군 길에서도 존경받은 순신
스님이 바친 미투리 값까지 치러
서민에게 민폐 끼치는 일엔 엄격

백의종군의 길에서도 이순신은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헛된 대접을 받지 않았고, 자신을 받드는 이들에게도 '청렴을 지킬 것'을 주문했다. 이순신을 돕는 이들이 다른 사람의 대접을 받고 왔을 땐 엄하게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심지어 한 스님의 '짚신' 선물까지 값을 치르고 받았다. 이순신은 모름지기 지도자가 어때야 함을 몸으로 보여준다. 4·10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금배지들이 배워야 할 덕목이다.

22대 국회의원들은 과연 국민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을까.[사진=뉴시스] 

이순신이 백의종군에 나서는 길에는 둘째 아들 울과 조카, 그리고 심부름 등을 해주는 몇명의 종들이 동행했다. 여기에 호송임무를 맡은 금부도사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졸 한언향이 붙어 다녔다.

「난중일기」를 보면, 금부도사는 이순신 일행보다 행선지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지방 관리들에게 이순신의 동선을 미리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의금부에서 수원부에 당도했을 때에도 그랬고, 1597년 4월 26일 구례현에 도착할 때에도 먼저 와 있었다.

구례에서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함께 싸웠던 손인필의 집으로 거처가 정해지자, 구례현감이 곧바로 찾아와 극진히 대접했다. 이때 술자리가 있었다. 이순신이 현감에게 금부도사에게도 술을 권해줄 것을 요청하자, 현감은 그 대접을 잘해줬다고 한다. 훈훈한 시간이 어느덧 지나고 저녁이 되자 이순신은 홀로 앉아 슬프고 아픈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다음날, 이순신이 순천의 바랑산 밑에 도착했을 때 구례현감이 보낸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제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돌려보냈다. 과한 신세를 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특히 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에는 엄격했다. 평상시에도 그랬지만, 백의종군 시절에도 그랬다.

정혜사의 스님 한 분이 5월 7일 이순신에게 미투리(짚신)를 바치려고 하자, 끝끝내 값을 치르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 미투리를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정명원에게 건네줬다. 하동 지역에 머물고 있던 6월 2일에는 고을 사람들이 종들에게 밥을 지어 먹으라며 쌀을 제공했다. 이때 이순신은 먹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다음날, 이순신은 종들이 고을 사람들에게 아침밥을 얻어먹고 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그는 매를 들어 종들을 훈육하고, 쌀을 보내 밥값을 치르게 했다.

이순신이 순천에 도착했을 때로 돌아가 보자. 4월 27일 저녁, 이순신은 송원(순천시 서면 학구리 신촌)의 정원명 집에 머물렀다. 이때 권율이 보낸 군관 권승경이 찾아와 조문했다. 이어 순천부사 우치적과 정사준이 잇따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이날의 만남 이후 이순신을 적극 뒷바라지하며 보필했다.

4월 28일 아침, 권승경이 다시 찾아와 "상중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시오"라는 권율의 말을 전달했다. 그는 또 "한산도 진중에 있는 절친한 군관에게 편지와 공문을 보내 나오게 하는 바이니 (보좌역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시오"라며 같은 내용의 문서를 손에 들려줬다.

이순신은 직이 있든 없든 '청렴함'을 지키려 애썼다.[사진=뉴시스]

두 번이나 권승경을 보낸 권율은 순천에서 며칠 동안 머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장은 이순신을 만나 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파직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터라 관계가 소원해진 까닭이다.

권율은 5월 1일에 순찰사 박흥로, 병마도절제사 이복남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순신을 피하듯 5월 2일 보성으로 떠나 버렸다. 어찌 됐든 이순신은 '몸부터 챙겨라'는 권율의 지시 내지는 배려로 17일 동안 순천에 머물렀다.

이순신은 온갖 심정을 조금이나마 다스려보려는 시도도 했다. 5월 3일엔 둘째 아들 이름 '울'을 '열'로 바꿨다. 그리고는 "소리는 '기쁠 열(悅)'과 같고 뜻은 '움이 돋아나다'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나다'로 풀이되는 매우 좋은 글자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순천에서 이순신은 옛 부하들과 지방 수령, 병마사, 순찰사, 체찰사 등 다양한 인사들과 소통하는 게 일상이 됐다. 일본과 원균의 동태 등 다양한 정보를 듣고 백의종군의 임무도 수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은 '왜적의 만행'과 '원균의 미래'를 예고하는 두 가지 현상을 마주했다.

5월 6일, 간밤에 꾼 꿈이 너무도 생생했던 터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꿈속에 형님들이 나타났다. 혼령들은 통곡하며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이렇게 됐다는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겠느냐'라고 하시니 더욱 비통할 따름이었다. 형님들은 또 남원의 추수를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남원의 추수 걱정'은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암시하는 이순신의 '예지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의 풍신수길은 6월 15일, 부하 장수들에게 "전라도를 짓밟아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유재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8월에는 '남원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왜적은 수많은 조선 백성들을 살육하고 코를 베어가는 악랄한 행위를 저질렀다. 결국 남원에는 추수할 백성들이 있을 턱이 없었고, 추수를 감독할 인물도 존재할 수 없었다.

원균의 미래를 예고하는 일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휘하 군관으로 맹활약했던 정사준의 말에서 시작됐다. 그는 4월 27일 이순신을 만난 자리에서 원균의 나쁜 행실을 꼬집었다. 그 이후 원균을 비판하는 이런저런 목소리가 잇따랐다. 병마절제사 이복남은 4월 30일 아침 식전부터 이순신을 찾아와 원균 얘기만 하고 돌아갔다. 5월 1일엔 전라좌수영의 진흥국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원균의 행실을 거론했다.

5일에는 충청우후 원유남이 "원균 때문에 앞날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날 이순신은 울컥했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1000리 밖 땅끝으로 종군하느라 어머니 영전에 예를 갖추지 못하고 곡하고 우는 것조차 내 뜻대로 하지 못하니,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한 갚음을 당하고 있는가. 나 같은 일은 예나 지금을 통틀어도 없을 것이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구나. 다만 때를 만나지 못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6일 저녁에는 한산도를 다녀온 정원명이 원균 얘기를 하면서 "부체찰사 한효순이 전라좌수영에 와서 병을 다스리고 있다"고 전했다. 8일에는 이경신이 찾아와 원균이 서리 직급의 부인을 겁탈하려다 난리가 난 적이 있고, 여전히 이순신을 모함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날 이순신은 일기 말미에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고 적었다.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이 구례로 이동할 예정이라는 소식에 그를 만나기 위해 5월 14일 미리 도착했다. 하지만 도원수는 17일 명나라 총병 양원을 영접하기 위해 전주로 방향을 바꾸자 헛걸음이 돼버렸다.

그런데 도체찰사 이원익이 20일 구례로 행차했다. 구명을 위해 힘써줬던 체찰사는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직접 만나러 온 것이다. 군관을 먼저 보내 조문토록 하고 저녁에 만나자는 서찰을 보냈다.

이순신이 도착하니 체찰사는 하얀 소복 차림을 하고 조문했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다가올 위기를 두고 의견을 나눴다. 이때 이원익은 "원균이 하는 짓에 음흉함이 매우 많음에도 하늘이 이를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하겠는가"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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