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포커스] "플랫폼 자율규제·AI법 `산업진흥` 원칙 지켜야"
이성엽 한국데이터법정책학회장(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기술법정책센터장)
"한국적인 상황에서 AI(인공지능) 법이 규제 중심으로 가선 안 됩니다. 또 미국과 EU(유럽연합)가 빅테크를 손본다고 해서 국내 플랫폼을 옥죌 게 아니라 그 속의 디테일을 봐야 합니다. 플랫폼 자율규제 원칙과 AI법의 산업진흥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총선을 비롯한 정치적 지형 변화가 국내 ICT와 방송·미디어 전반에 미칠 법·제도적 영향이 주목되는 가운데 국내 대표적인 ICT 분야 법·제도 전문가인 이성엽(56·사진) 한국데이터법정책학회장(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은 이 같은 목소리를 내놨다.
이 교수는 "플랫폼법 제정을 밀어붙이던 공정거래위원회가 보류하는 모양새지만 움직임이 여전히 있다. 여기에다 부가통신사업자로 분류된 플랫폼 기업의 의무를 강화하려는 논의도 있다. 그동안의 자율규제 원칙이 흔들리는 것"이라며 "최근 국회와 정부 내에서 AI 법제화를 서두르면서 진흥 중심의 기존 법안에서 규제 비중을 늘리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부, 법무법인, 대학에 골고루 몸담은 혁신산업 법제도 전문가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후 서울대 행정학 석사, 미국 미네소타대 법학석사를 거쳐 서울대에서 법학박사를 받았다. 35회 행정고시 합격 후 정보통신부, 국무조정실을 거쳐 2004년부터 김앤장에서 방송, 통신, 인터넷, 개인정보 분야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현재 고려대 기술법정책센터장과 데이터AI법센터장을 맡고 있고,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개인정보규제심사위원회 민간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이 교수는 기술혁신과 산업 이슈는 기업이 '키'를 쥐고, 정치와 행정은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게 아니라 기업에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로벌 표준에 맞지 않은 규제는 과감히 풀어서 혁신산업이 충분히 뿌리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이 교수는 "독점을 막기 위한 미국의 경쟁법에는 확실한 기조가 있다. 철도, 통신, 마이크로소프트에 이르기까지 독점이 심해져서 가격 인상 등 소비자 이익을 침해하면 강력하게 개입하는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최근 애플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폐쇄적 전략으로 성장하는 것은 두고 봤지만 그것이 소비자의 선택권 제한과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니 이를 정조준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미 정부는 이런 움직임 속에서도 자국산업 보호 기조는 분명하게 유지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이를 잘못 해석해서 자칫 네이버, 카카오 등에 규제 잣대를 들이댈 경우 글로벌 빅테크에 비해 한참 체급이 적은 이들 기업의 경쟁력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것. 4·10 총선에서 야권이 이기면서 플랫폼 산업에 대한 규제 강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규제 강화가 불러올 파급효과를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과거 전통산업을 키울 때 정부가 밀어붙였던 산업육성 정책을 플랫폼에도 적용하자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이 교수는 "1970~1980년대에 재정부터 세제, 입지를 집중 지원해 중화학·반도체 같은 주력산업을 키워냈는데 이제 남은 게 플랫폼 정도다. 우리 플랫폼 기업이 세계에서 삼성이나 현대 같은 역할을 하려면 그에 맞는 산업정책을 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최근 정부가 미디어·콘텐츠 분야 육성을 위해 1조권 규모의 펀드를 만들고 세액공제, 규제혁신까지 종합 지원책을 내놓은 것을 예로 들었다. 이 교수는 "핵심은 규제혁신이다.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과 비교해서 과한 규제를 풀어주자"면서 원격의료, 모빌리티, 리걸테크, 프라이버시 규제를 예로 들었다. 그는 "플랫폼 기업이 글로벌 빅테크로 크려면 인수합병도 더 풀어주는 게 맞다. 규제혁신과 함께 필요하면 전통적인 산업육성 정책까지 두 바퀴를 달아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AI 관련 법제도도 뜨거운 감자다. EU가 세계 최초로 포괄적인 AI 규제법을 통과시키며 가장 앞서가고 있고, 세계 각국이 편향성, 차별, 저작권·개인정보 침해 등의 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국 정부는 AI 관련 규범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EU가 지난달 13일 통과시킨 AI법은 AI 위험을 금지, 고위험, 제한, 허용 등 4단계로 구분해 규제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법은 5월 중 승인을 거쳐 2년 후 시행될 예정이다. 이 교수는 AI법 역시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최소의 규제를 담되 법에서 진흥의 비중이 70~80%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EU가 했다고 우리도 한다는 식으로 가선 안 된다. EU AI법도 5월 발효 후 시행은 2년 뒤이고, 고위험 AI 규제는 3년 뒤에나 시행된다. 고위험 AI가 뭔지 범위를 확정하는 데만 몇년 걸릴 전망"이라면서 "이번 국회 회기 안에 통과시키자며 디테일을 놓치며 몰아치듯이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EU가 만든 규칙이 곧 글로벌 표준이 되는 이른바 '브뤼셀 효과'가 AI법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5월에 발효돼도 2년 뒤에 시행되고 고위험 AI는 그로부터 1년 후에나 시행되는데, 2~3년 뒤 어떤 일이 발생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법이 실효성을 가질 지 의문이라는 것. 법 조항도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 후속작업이 많이 필요하고, 미국이 자국 AI기업을 키우면서 중국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EU의 규제를 그대로 받아들일 확률이 낮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 교수는 "미국, 중국, EU, 영국 등이 AI 규범을 두고 주도권 경쟁을 하는데 EU가 만든 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자체 산업이 있는 나라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서 법을 만드는 게 맞다"면서 "우리는 산업 진흥에 무게를 둬야 한다. 법에 진흥이 70~80% 정도 담기고 규제는 20~30%면 충분하다. 자칫 5대 5나 6대 4 정도로 진흥 비중이 줄어들면 아직 싹조차 못 틔운 AI산업의 앞날이 흔들릴 수 있다"고 했다.
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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