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말한다] 김영삼 가택연금 1983년 4월 18일

2024. 4. 1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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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두환의 등장은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적 암흑기였다.

신군부는 권력 장악에 장애물이 되는 김영삼을 정치활동 금지로 묶어놓는 바람에 그는 꼼짝도 못하고 자택에 머물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김영삼의 사진은 보도 불가였지만 상도동 부근을 지나가다 카메라를 감추고 그의 자택에 접근을 시도했다.

서재에 앉아 있는 김영삼을 보고 인사를 하자 '신문에 보도도 안 되는데 찍어서 뭐하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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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두환의 등장은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적 암흑기였다. 신군부는 권력 장악에 장애물이 되는 김영삼을 정치활동 금지로 묶어놓는 바람에 그는 꼼짝도 못하고 자택에 머물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김영삼의 사진은 보도 불가였지만 상도동 부근을 지나가다 카메라를 감추고 그의 자택에 접근을 시도했다. 안면이 있는 비서가 문을 열어줘 들어갔다. 서재에 앉아 있는 김영삼을 보고 인사를 하자 '신문에 보도도 안 되는데 찍어서 뭐하나'라고 했다.

'당장은 보도가 안 되더라도 역사를 말해주는 사진은 찍어놓으면 언젠가 사진이 말을 합니다'라고 하니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달 후 김영삼은 '광주사태(5·18 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이하는 날,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구속된 인사들 전원 석방, 정치 규제자 전면 해금, 해직 교수와 제적 학생의 복직, 복교, 복권과 언론 자유 보장 등 5개의 민주화 요구를 하며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사진 기록은 제대로 '타이밍'이 맞았던 셈이다. 당시 김영삼은 죽기를 각오한 단식투쟁으로 김대중보다 언론으로부터 더 많은 각광을 받았다.

[전민조 다큐멘터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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