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거부권’을 시민이 거부한 총선···“22대 국회가 한 가닥 희망”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가장 많은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다. 취임한 지 2년도 안돼 양곡관리법, 간호법,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방송3법, 김건희 여사 특별검사 도입법, 50억 클럽 특검법, 이태원 참사 특별법(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 등 총 9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경향신문은 14일 윤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의 당사자인 농민, 간호·언론 노동자, 이태원 참사 유족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대통령의 거듭된 거부권 행사가 대통령을 향한 부정 평가와 지난 4·10 총선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오는 5월부터 시작될 제22대 국회에서는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들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입틀막’과 방송3법
윤창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입틀막’(입을 틀어막음)으로 상징되는 언론·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으로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확산하지 않게 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욕망이 드러난 2년”이라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현 정부가 ‘방송 3법’ 개정 필요성에 대해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방송 3법 개정안은 공영방송 3사의 이사 수를 늘리고 이사 추천 주체를 다양화해 정치권의 영향력을 줄이는 내용이다.
박민 KBS 사장 취임 이후 KBS에서는 특정 시사프로그램이 폐지됐다.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을 대체한 대담은 ‘정권 홍보 방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는 돌연 ‘불방’됐다.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은 ‘회칼 테러’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선거방송심의위원회는 정권 비판 보도를 ‘표적 심의’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KBS·MBC 사장을 선임하는 주체인 KBS·방송문화진흥회 이사들의 임기는 오는 8월 중 끝난다. 윤 위원장은 “늦어도 8월 전까지 방송 3법을 재입법하고 처리하지 않으면 양당이 서로 ‘방송 장악’이라고 핏대 높이며 싸우는 일이 반복될 것”이라며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방심위와 선거방심위의 보도 공정성에 대한 심의 자체를 폐지하는 방향의 입법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파 875원’과 양곡관리법
강순중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정책위원장은 “‘대파 875원은 합리적’이라는 윤 대통령의 발언에 농민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인건비·비룟값 등 대파를 키워내는 데 들어간 비용도 회수할 수 없는 터무니 없는 가격이라고 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수요량 초과·가격 급락 등이 발생할 때 정부가 가격 안정을 위해 의무적으로 쌀을 매입하도록 하는 법안이다. 2022년 농가 농업 소득(통계청)은 평균 949만원이었다. 강 위원장은 “이 정도 소득으로는 청년이 농촌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다”며 “최저임금처럼 농민에게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 위원장은 농업인이 양곡 생산에 투입한 생산 비용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공정 가격’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기후위기 시대에 맞게 농작물 재해보험을 강화하고, 식량을 국가 내에서 스스로 생산해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에 중점을 둔 농민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해배상 폭탄’과 노란봉투법
최현환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지회장은 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가압류 압박이 아닌 노사 교섭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란봉투법에는 폭력·파괴행위를 제외한 파업 노동자를 상대로 사용자가 손해배상 소송 및 가압류를 거는 것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겼다.
2022년 10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공장에 불이 났다. 일본계 다국적기업 닛토덴코의 자회사인 사측은 공장 복구가 아닌 청산을 결정하며 직원들에게 희망퇴직을 권했다. 노조가 이를 거부하며 단체행동을 벌이자 사측은 ‘공장 철거 방해금지 등 가처분’을 걸었다. 법원이 지난 1월 이를 인용하면서 950만원의 간접강제금이 매일 쌓이게 됐고, 이 돈을 내지 못하자 추심명령이 떨어져 최 지회장의 아파트가 강제 경매에 넘어갔다. 공탁을 걸어 지난달 간접강제금이 소송이 끝날 때까지 집행 정지됐지만, 걱정은 여전하다.
최 지회장은 22대 국회에서 노란봉투법이 재상정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기대도 있지만, 야권 의석수가 200석이 안 돼 걱정도 된다”며 “노동자가 있어야만 경제가 돌아간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안인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총선’과 이태원 참사 특별법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남훈씨(당시 28세)의 어머니 박영수씨(57)는 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전국 6개 도시를 순회했다. 유가족들은 “진실에 투표해 생명 안전 국회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박씨는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을 길 위에서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악법’이라며 설명하지 않고 거부하는 태도가 문제였다”고 말했다. 박씨는 “어머니 힘내세요” “외국에서 투표하러 왔어요”라며 다가오던 시민들이 큰 힘이 됐다고 전했다.
이태원 참사의 독립적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요구하는 박씨는 1만5000배, 오체투지, 삭발 등으로 호소했으나 대통령의 거부권에 직면했다. 그는 “정치는 냉혹하더라”고 말했다. 박씨는 “한 가닥 희망이 있으면 잡아야 하는 상황이니 기대를 안 한다면 거짓말”이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 논의하는 국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사 파업’과 간호법
국민의힘은 지난달 의사 파업이 길어지자 간호법 제정안을 냈다. 지난해 여당이 반대하고 대통령이 거부했던 법안이다. 정부는 지난 9일 무급 휴가 중인 간호사가 다른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오선영 보건의료노조 정책국장은 “간호사를 소모품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며 “간호사의 손이 필요하니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꿨다”고 말했다.
간호법 제정안은 의료법 내 간호 관련 내용을 분리해 간호 인력의 자격, 업무 범위, 처우 개선 등을 담은 법이다. 일각에서는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현장의 변화가 더딜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오 국장은 “한국에서는 간호사 한 명이 평균 약 20명의 환자를 돌봐 빨리 소진될 수밖에 없다”며 “간호법 제정과 더불어 간호사 1명이 5명 정도의 환자를 돌보도록 해서 간호 인력이 그만두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보완 입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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