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짜며 남은 인생을 짠다
김윤신 조각가와 김용익 화가 나란히 개인전 열어
잘 살아가는 것도 작업이다!
현대미술 작가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꽤 있다. 일부러 작품으로 티 내지는 않아도 삶을 예술과 온전하게 하나로 만들어내려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작업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세기 유난히 굴곡진 근현대사를 살았던 한국 미술가들에게서 이런 경향은 유난한 편이다. 원로 대가들의 경우 삶의 곡절이나 일상들이 작품의 재료나 형상, 형식과 하나로 녹아드는 경우가 적지않다. 90년대 이래 한국 미술판에서 큰 흐름을 형성한 개념 미술 작가들의 경우엔 머리 속 생각의 과정을 작품으로 빚어내는 특유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도적으로 살아내기의 체험과 상념들을 형상화하는 작업에 매진하곤 한다.
지금 서울 국제갤러리 본점과 부산점에서 ‘삶을 살아가는’ 작업 양상을 각기 다른 맥락에서 보여주는 두 원로 대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내년이면 90살이 되는 여성조각가로, 아르헨티나에 본거지를 두고 30여년간 활동해오다 지난해 귀국전을 치르고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까지 초청받은 김윤신(89)씨의 회고전(28일까지)과 70~80년대 현대회화 운동 주역이었다가 2000년대 들어 땡땡이(동그라미들) 채워진 개념적 그림으로 부각된 화가 김용익(77)씨의 근작전 ‘아련하고 희미한 유토피아’(21일까지)다.
김용익 작가는 1970년대 국내 모더니즘 단색조 회화 진영의 주장이었던 박서보 작가 계보 그룹의 일원이었다. 80~90년대 이후에는 박서보 진영과 결별하고 모더니즘 미술의 본질과 경계 탐구의 일환으로 자신의 그림 내력에 대해 성찰적 탐구를 지속해왔다. 그 또한 잘 사는 것 자체가 좋은 작업이라 여기면서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작업실에서 삶의 마지막을 주시하는 수행승처럼 매일 두 시간 남짓 그리는 작업들을 거듭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 2018년 12월31일 밤 계시를 받은 것처럼 마음이 일어나 시작한 ‘물감 소진 프로젝트’의 산물들을 보여준다. 더이상 화구를 사지 않고 남아있는 물감이나 색연필 등으로만 그리면서 남은 삶과 함께 소진하겠다는 구상을 담은 연작들이다. “죽음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제의적 행위”이자 “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라고 설명한 이 연작들은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 같은 형상들을 맨살 화폭 위에 구획된 공간(그리드) 안에서 각각 옅고 흐릿한 색깔과 형태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남은 물감을 여생 동안 여유롭게 아껴가며 쓰려는 의도가 반영된 셈이다. 지난 2022년 8월31일, 국외 미술관 관계자들이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국내 중견작가 작업실 탐방 프로그램 일환으로 양평 작업실을 찾았을 때 작가가 예고했던대로다. “비축한 물감이 다 떨어지면 더이상 작업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면서 당시 미리 보여주었던 소진 프로젝트 연작들을 이번에 처음 전시장에 풀어낸 것이다.
작가가 털어놓은 전시의 다른 열쇳말은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꺼냈던 개념인 ‘헤테로토피아’(현실 한 쪽에 존재하는 낯설거나 전복적인 공간)다. 2016~2022년 작업한 근작 ‘절망의 미완수 22-2’를 보면, 까만 원들을 그려 넣었던 구작 화폭 위에 다시 퍼티를 섞은 허연 아크릴 물감을 여기저기 여백을 두고 농도를 가감하며 덧발라서 세월의 흐름과 작가 자신의 의식적 변화 등을 표현한다. 원래 작품이 지녔던 모더니즘적인 추상 기운은 사라지고 현실과 작가 내면에 대해 소심하게 고민하거나 저항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속성이 드러난다. 덧칠한 부분 곳곳에 ‘답답할 듯하여 이 두칸은 비워놓는다’ ‘벽에 똥칠을 하듯 칠해 보았다’ 같이 작업의 감상을 적어내려간 대목들도 눈에 띈다. 서울 한옥갤러리에 나온 근작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소심한 부정 #22-11’(2022)은 ‘물감 소진 프로젝트’로 그려진 옅은 그림이나, 기실 헤테로토피아적인 작품이다. 태극 괘 형상으로 나타난 화폭 양쪽 위 아래에 아크릴 물감 덩이를 확 덧바르면서 꺼지지 않은 표현의 충동을 이질적으로 표출한 까닭이다. ‘땡땡이’ 원들을 그린 구작의 도상과 이 원들을 음화된 네거티브 색채로 반전시킨 또다른 도상의 화폭을 이어 붙여 부산 전시장 바닥에 내려놓은 대작(‘땡땡이 화가의 변신은 무죄’)도 벽걸이 그림 틀거지를 뒤집는 노작가의 결기를 내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의미로 다가온다.
‘아련하고 희미한…’이란 전시 제목은 50여년간 작가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며 영향을 미쳐온 근대 모더니즘의 예술과 생활문화가 이젠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이 됐고 모더니즘적 이상이 양극화와 기후변화 같은 치명적 후과들을 낳으면서 희미해진 잔영이 되어버렸다는 깨달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삶과 일상의 성찰을 그림 그리기로 지속하며 자기 갱신에 애쓰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전시 마당이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케이(K)1, 케이2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김윤신 조각가 회고전은 입체와 색면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고가는 조형 언어의 힘으로 ‘삶을 살아가는 작업’의 의미를 보여준다. 그는 6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70년대 국내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류조각가회 결성을 주도했고, 80년대 중반부터 남미로 옮겨가 곳곳을 돌며 창작활동을 해온 노마드 아티스트(한곳이나 한 유형에 머물지 않고 유랑과 유목적 작업에 몰두하는 예술가)다. 지난해 남서울미술관 회고전에서 우뚝 선 남미산 나무조형물과 명징한 색조의 회화조각 등을 내보여 미술판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보다 작업들의 진폭과 내용이 다채로와졌다. 분단과 전쟁으로 실향과 이산을 겪은 가족사를 나무조각들을 차곡차곡 잇대어올린 구조물로 형상화한 70년대 작 ‘기원쌓기’부터 유창목, 알가로보 등의 남미자생목으로 만든 수직적 구도의 상들로 이방인 작가의 생존 의지를 표상한 신구작이 두루 나왔다. 특히 팬데믹 시기 폐목재 덧댄 조형물 표면에 오방색과 현지 토템의 색채를 가미하고 문양을 덧그린 ‘채색회화조각’ 근작들은 색과 형이 한몸으로 녹아드는 유기체적인 조형세계를 펼쳐낸다. 재생용 목재 조각들을 높이 1m를 넘는 직립상 형태로 얼기설기 붙이고 아크릴 물감으로 표면을 채색하면서 기하학적 문양 등을 그려 도열하듯 배치한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근작들은 이런 양상을 대표하는 수작들이다. 남미 장식예술에 보이는 몽환적인 다색과 기하학적 형상이 화폭 위에 울렁거리는 그림들, 그 옆에 비슷한 구도를 띠며 도열한 채색 조각들은 서로 절묘하게 어울리면서 기존 국내 조각계에서 보지못했던 환상적 미감을 빚어내고 있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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