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살롱 피바다’ 만든 살인 중독자들의 여유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수배전단 보며 “저게 나다” 여유 부리고 검거 임박하자 신문사에 인터뷰 자청하기도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서울 구로구 구로2동의 한 건물 지하에는 '샛별룸살롱'이 있었다. 1989년 8월부터 66㎡ 규모에 룸 4개를 갖추고 영업을 시작했다. 주변에는 20여 곳의 술집이 밀집해 있어 평소에도 불량배들의 다툼이 잦은 곳이었다.
1990년 1월28일 밤 9시경. 20대 남성 두 명이 들어왔다. 종업원인 강아무개양(18)이 룸에 들어가 이들을 접대했다. 약 1시간 동안 양주와 맥주를 마신 남성들은 룸을 나갔다가 밤 11시40분쯤 다시 찾아왔다.
이들은 다짜고짜 강양에게 2차를 요구했다. 강양이 "나는 남자친구가 있다"며 "외박은 나가지 않는다"고 거부하자 뺨을 때렸다. 업주가 말리자 이들 중 한 명이 자신의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하며 업소를 나갔다.
10대 남녀 4명 룸살롱에서 살해돼
다음 날인 29일 밤 12시30분쯤 룸살롱 업주는 종업원 3명을 남겨두고 먼저 퇴근했다. 그는 집에 가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 20분 후 룸살롱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업주는 맞은편 당구장에 전화를 걸어 아르바이트를 하는 유아무개군(18)에게 "룸살롱에 전화했는데 통화가 안 된다"며 "직접 가서 보고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유군은 "알겠다"고 말하고 룸살롱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같은 날 오전 1시쯤 룸살롱 건물 1층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여성 원아무개씨(47)가 영업을 끝내고 내실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 후 지하 룸살롱에서 "꺅" 하는 여자 비명을 들었다. 원씨는 예사롭지 않다고 보고 조심스럽게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출입구 바깥에는 여성 종업원 김아무개양(19)이 알몸 상태로 흉기에 찔려 온몸에서 피를 흘린 채 숨져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출입문 앞에 당구장 아르바이트생인 유군이, 내실에는 종업원 김아무개군(17)의 시신이 보였다. 강양은 가라오케 무대 앞에서 옷이 모두 벗겨진 상태로 온몸이 흉기에 찔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원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이때까지 강양은 살아있었지만 출동한 경찰이 병원으로 옮기던 중 결국 사망했다. 룸살롱에서 10대 남녀 4명이 집단 살해된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김군은 서울에 있는 공고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전까지 영등포에 있는 레스토랑 종업원으로 일하다 3개월 전부터 여자친구인 강양과 함께 이 룸살롱에서 일해 왔다고 한다. 유군은 김군의 학교 친구로 이모부가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유군이 평소 룸살롱에 자주 찾아왔기에 업주도 잘 알고 있었다. 강양과 김양은 지방에서 올라와 룸살롱 안에 딸린 방에서 기거해 왔다.
경찰은 구로경찰서 오봉파출소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범인 검거에 나섰다. 이를 위해 경찰이 보관하고 있던 동일 수법 전과자 사진을 룸살롱 업주에게 일일이 확인 대조했다. 그 결과 조경수(24)와 김태화(22)를 유력 용의자로 특정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얼마 전에 광주에서도 술집 종업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시비를 벌이다 흉기로 찔러 죽이고, 주인에게도 중상을 입힌 후 도주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조경수와 김태화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고향 선후배 사이였다. 1985년 3월 강도 행각을 벌여 특수강도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89년 5월 석가탄신일 가석방으로 인천 소년교도소에서 출소했다.
훔친 돈으로 도주 중 애인과 밀회
그런데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광주와 서울에서 5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된 것이다. 범행 후에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대전으로 잠입, '김건일'이라는 가명으로 6개월치 월세를 선납하고 셋방을 얻었다. 수원에서도 가명으로 셋방을 하나 더 얻은 후 두 지역을 오가며 몸을 숨겼다.
이들은 돈이 떨어지자 다시 서울로 올라가 미용실에서 강도 행각을 벌였다. 미용실을 택한 이유는 종업원과 손님 대부분이 여성이라 제압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범인들은 1990년 2월6일 오후 6시쯤 중구 명동의 L미용실에 마스크를 쓴 채 가스총과 등산용 칼을 들고 들어갔다. 여기서 종업원과 손님 9명을 대기실에 몰아넣고 옷을 모두 벗게 한 후 현금과 금품을 빼앗아 달아났다. 이틀 후인 2월8일 오후에는 종로에 나타났다. 범인들은 유명 제과점 건물 2층에 있는 S미용실에 들어갔다. 당시 미용실에 있던 손님과 종업원 20여 명을 미용실 내 마사지실에 몰아넣고 역시 모두 옷을 벗게 한 후 현금과 금품을 강탈했다.
서울 미용실에서 동일범으로 보이는 연쇄 강도 사건이 일어났지만 경찰은 조경수와 김태화의 범행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룸살롱 살인 사건에 비해 잔인함이 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갈수록 더 대담하게 행동한다. 1990년 2월26일 밤 8시50분쯤 범인들은 구로구 가리봉동의 한 카페에 나타났다. 샛별룸살롱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이었다. 이 카페에는 조경수의 여자친구 이아무개씨(21)가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씨는 카페 단골손님이었던 조씨와 연인이 됐고, 룸살롱 사건 이후 카페를 그만두려 했다. 그러나 조씨를 잡으려는 경찰의 요청으로 계속 일하고 있었다.
이날 카페에는 사복경찰관 6명이 권총으로 무장하고 잠복해 있었다. 당시 이씨는 형사와 대화 중이었다. 조경수는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카페로 들어가 다른 종업원을 통해 이씨를 밖으로 불러냈다. 이들은 미리 훔쳐뒀던 차를 타고 김태화와 함께 유유히 서울을 빠져나갔다. 경찰은 뒤늦게 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조경수와 김태화, 이씨는 대전으로 내려갔다. 김태화는 훔친 차를 몰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조씨와 이씨는 대전 셋방에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낮에는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봤고, 밤에는 집 근처에서 술을 마시면서 지냈다. 이씨를 백화점에 데려간 조경수는 강탈한 돈으로 백과 화장품, 구두 등을 사주고 돈을 건네기도 했다. 두 사람은 대전 시내는 물론 인근 계룡산과 보문산도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겼다. 이 과정에서 한 번도 경찰의 검문검색을 받지 않았다. 조경수는 시내 곳곳에 붙어있는 수배전단을 가리키며 "저게 나다"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5일을 함께 보냈다.
3월2일 오후, 이씨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경찰에 신고했다. 그런데 이씨는 조경수의 행적에 대해 거짓으로 둘러댔다. 대전역에서 헤어졌다고 했지만 당시 상황을 재연하지 못했다. 경찰은 이씨를 추궁해 조경수가 평택에서 내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평택에서 내린 것으로 봐서 수도권에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은신처 수색에 집중했다. 먼저 평택의 '벌집'(작은 방 한 칸에 여러 사람이 세 들어 사는 집)수색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수색 범위를 인근 지역으로 확대해 수원 시내 벌집을 뒤지다 권선구 세류동 근처에서 조경수와 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3월5일 경찰은 일대 부동산중개업소를 탐문하다 조경수의 은신처를 확인했다. 곧바로 이곳을 급습해 검거에 성공한다. 조경수가 붙잡혔다는 것을 알게 된 김태화는 검거에 결정적 제보를 한 중개업소 사장에게 보복하기 위해 두 차례 찾아갔다. 하지만 사무실 안에는 어린이들만 있거나 문이 잠겨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경수가 검거된 지 4일 후인 3월9일, 김태화가 서울시 경찰청 최중락 형사과장(드라마 '수사반장'의 실제 모델)에게 전화를 걸어 조건부로 자수할 뜻을 밝혔다. 그 조건이란 정상참작과 현상금 인상, 검거된 조경수와의 통화였다. 최 과장은 "현상금 인상은 상부에 건의해 보고 나머지는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얼마 후 김태화는 형사과장실에 대기하고 있던 조경수와 3분간 통화한다.
사건 이후 '청소년 유흥업소 알바' 논란
이후 김태화는 대담하게도 같은 날 한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자청했다. 인터뷰 장소였던 서울 종로의 한 레스토랑에 나타난 김태화는 출동한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이로써 사건 발생 39일 만에 범인들이 모두 검거됐다. 이들은 2건의 살인을 비롯해 미용실 강도 25건, 차량 절도 3건, 노상강도 1건 등 30건이 넘는 범행을 저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1심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전과자라고 낙인찍혀 사회의 냉대를 받아 세상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없던 나이 어린 종업원 4명에게 칼을 휘둘러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게 살해한 것은 단순히 일시적 충동에서 저지른 범행이라 보기에는 범행 수법이 너무나 끔찍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조경수와 김태화는 불복해 상소를 이어갔지만 2심 재판부와 대법원도 원심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1991년 12월18일 두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 미성년자들의 유흥업소 근무가 논란이 됐다. 샛별룸살롱 피해자 4명 중 남성 2명은 고등학생이었고, 여성 2명은 가출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입시 준비에 바쁜 인문계 고교생과 달리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실업계 학생들 사이에는 방학이나 방과 후 아르바이트가 유행처럼 여겨졌다. 유흥업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부 학교에서는 아예 '아르바이트 금지령'을 내리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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