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꽃피는 봄이 오면…나는 꽃구경하는 ‘사람’을 본다[이다의 도시관찰일기]
찰칵, 봄에는 누구나 꽃 사진을 찍는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꽃 앞에서 홀린 듯이 카메라를 들고, 카톡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이 꽃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뀐다. 사람들이 보내오는 메시지에도 꽃이 가득하다. 작년에 봤던 꽃인데 올해도 여전히 반갑고, 겨우내 이름을 몰랐던 나무들이 꽃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창경궁 홍매화 대박! 그런데 사람 미어터짐.” 트위터에는 실시간으로 꽃 소식 중계가 올라온다. “드디어 봄이야 #벚꽃 #벚꽃스타그램 #봄날” 인스타그램 피드도 꽃 사진으로 가득하다. “불광천 벚꽃 피었나요?” “방금 보고 왔는데 이번 주말이면 만개할 거 같아요 ㅎㅎ.” 동네 오픈채팅방에서도 언제 무슨 꽃이 피는지가 제일 중대한 이슈다.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닐 때에도 나는 도시를 관찰하면서 기록을 위한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을 참고해 나중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주거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의 집 담벼락에 붙은 경고문이나 건물 앞에 놓인 주차금지 볼라드(길말뚝)를 찍고 있으면 매번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는다. “아가씨, 대체 뭘 찍는 거야?” 날 선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뒤통수에 내다 꽂힐 것 같다. 그런데 의심할 만도 하다. 만약 우리집 앞에서 누가 사진을 찍고 있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경계할 것이다. 저놈이 도둑놈인지, 아니면 구청 직원인지, 그것도 아니면 재개발 추진위원회가 아닌지 의심할 거다.
그런데 꽃을 찍을 때만은 자유롭다. 누구도 경계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꽃을 찍는 행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눈부시게 만개한 목련나무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그것이 자신의 집 앞이라도 그럭저럭 눈감아 준다. 아니, 오히려 집주인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른다. “보는 눈은 있어서 우리 집 꽃 예쁜 줄은 아네!”
꽃이 핀 곳을 지나갈 때면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하는 요청을 가끔 받는다. 아무래도 셀카로는 꽃나무 전체의 모습과 사람을 동시에 담기 어렵다. 카메라를 건네받으면 최선을 다해 가로 2컷, 세로 2컷을 찍어준다. 꽃이 잘 담기면서도 사람이 외면당하지 않도록 구도와 수평도 성실히 맞춘다. 요청한 사람은 대개 사진을 확인하지도 않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산뜻하게 자리를 떠난다. 사진이 잘 나왔든 못 나왔든 목적을 다 이룬 듯 즐거워 보인다. 갈 길이 있을 때 이런 요청을 받으면 약간 귀찮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일이다. 만약 나도 일행과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요청이 반갑기도 하다. 카메라를 돌려주면서 “저희도 한 장 찍어주실래요?”라고 하면 되니까.
봄과 사진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작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일 때문에 덕수궁 근처에 나왔다가 밥시간이 되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덕수궁 돌담길 옆 건물 2층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비좁은 계단을 오르니 창밖 풍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오… 풍경 뭐야.” 덕수궁 돌담길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뜻밖의 횡재를 즐기며 곤드레밥을 주문하고 창가 좌석에 앉아 바깥을 구경했다.
열린 창문 밖, 내 눈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인다.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는 무뚝뚝하고 어딘가 지친 얼굴의 행인들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 같다. 모두 하하호호 웃으며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다. 언론에서 꽃 소식을 전할 때마다 언급하는 ‘시민들의 즐거운 한때’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중 중년여성 넷이 모인 무리가 눈에 띄었다. 여고 동창인지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친근하다. (이분들을 그룹A라고 칭하겠다.) 그들은 돌아가며 돌담길 옆에서 포즈를 취한다. “얘, 너도 찍어줄게!” 장난기 가득한 몸짓과 표정은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한바탕 사진을 찍고 나자 그들은 결단을 내린다. “이번엔 우리 넷이 같이 찍자.” “그래, 누구 하나 빠지면 서운하잖아.” “그럼 어쩌지… 아, 저기 실례지만 저희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그룹A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사람은 덕수궁 돌담길에 서 있는 안전요원 어르신이다.
노년의 안전사고 방지 요원, 중년 여성들의 단체 꽃 사진 촬영 부탁에 어색한 ‘찰칵’
뿌듯했는지 ‘사진 찍어주기’ 임무 위해 주변 맴돌았지만 사람들은 회피만
어쩌면 나도 상대방의 배려나 호의를 오해한 적이 많지 않았을까?
아까부터 나는 그룹A와 함께 이 어르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형광색 안전요원 조끼를 입고 검은 바지에 구두를 신은 노년의 남성이었다. 캡모자 아래는 하얗게 센 머리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 어르신은 돌담길 가장자리에 반듯한 자세로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한 번도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짝다리를 짚고 서지 않았다. 잠시도 딴청을 피우지 않는 모습이 신기했다. 휴대폰은 한 번쯤 열어볼 법도 한데 말이다. 어르신은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해야 할 일 - 혹시나 근방에서 일어나는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것 - 에 100% 전념하고 있었다. 그 주변만 고요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룹A가 어르신에게 사진을 찍어주십사 부탁하자, 그는 약간 어색한 자세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이런 일이 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해 서너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오호호, 정말 잘 찍으신다~ 감사해요!” 그룹A는 어르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저마다 소란스러운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때부터 이 어르신은 약간 달라졌다. 자신의 임무에 ‘시민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 추가된 것이다. 마침 20대 여성으로 이루어진 그룹B가 나타나자 어르신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이 사진을 찍는 내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룹B는 어르신의 존재를 금방 눈치챘다. 하지만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리가 없다. 그들의 눈에는 어떤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어르신은 진한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 표정도 읽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찍어드릴까요?”하고 물어본다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할 텐데, 어르신은 또 그런 적극적인 성격은 아닌지 그저 그들을 쳐다보며 사진을 찍어줄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듯했다. 그룹B는 어르신의 시선을 불편해하면서 자리를 떴다. 이번에는 30대 남녀 커플인 그룹C가 등장했다. 어르신은 이번에도 그들이 사진을 찍는 바로 옆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룹C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불편한 얼굴로 황급히 떠나버렸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난 왜 이걸 봐 버렸을까. 따끈따끈 김이 나는 곤드레밥에 집중해도 모자랄 마당에 남의 겸연쩍은 일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것이다. 나라도 이따 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야 하는 건가? 이 에피소드의 맥락은 오직 나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안다. 그룹B와 그룹C는 어르신의 사정을 알 길이 없다. 그저 ‘덕수궁 돌담길에서 사진 찍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옆에 서서 빤히 이상하게 쳐다보더라’ 하고 불쾌한 사건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들을 쫓아가서 “저 어르신은 사진 찍어주고 싶어서 그렇게 뻘쭘하게 서 있었던 거예요!”라고 알려줄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어쨌거나 밥그릇은 싹싹 비우고 나왔다. 어르신이 아직도 뻘쭘하게 서 있다면 나라도 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사이 어떤 외국인 가족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는지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어르신은 각도를 바꾸어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막힌 데가 뚫린 것처럼 마음이 개운해졌다. 휴, 됐다. 이 에피소드는 해피엔딩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또 이야기에는 맥락이 있다. 하지만 타인은 전체가 아닌 짧은 부분만 볼 수 있다. 20회차짜리 드라마에서 17회 초반 10분만 보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나도 저렇게 남을 오해한 적이 많지 않았을까? 사실은 멀리서 내려다본다면 전체 맥락은 그런 게 아닐 때가 많지 않았을까?
그룹B와 그룹C에게도 자신들만의 맥락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덕수궁 돌담길에 도착하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나와 어르신의 입장에서는 ‘사진을 찍어주려는 호의를 이상하게 오해한 사람들’로 분절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맥락에서 보면 또 이 에피소드는 전혀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수선스럽게 꽃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는 이 계절은 기나긴 겨울을 지나온 한국인에게 축복과도 같다. 고개만 살짝 돌려도 길옆에 피어난 꽃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으니까.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과 찍어주려는 사람의 우연하고도 절묘한 만남이 이 계절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서울은 몇몇 명소를 제외하면 거대한 군락도 없고 배경은 모두 콘크리트나 벽돌이지만 이 삭막한 도시의 꽃구경도 제법 멋지다. 복잡한 건물들 사이 뜻하지 않게 드러난 목련나무 한 그루가 큰 감동을 주는 것처럼, 누군가의 에피소드를 살짝 들여다보는 것도 그 못지않은 경이로운 일이다.
날이 저물기 전에 다시 나가야겠다. 꽃 주변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또 생겨날지 모르니까 말이다.
▲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이다|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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