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김지원표 부등식..‘고장난 헤어드라이어>1조 클럽’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그저 가만히 있으면 따뜻한 바람이 춤을 춘다. 그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슬쩍슬쩍 목덜미를 간지른다. 그리고 한 번씩 조심스런 손길이 그런 머리칼들을 출썩인다. 머리카락엔 분명 감각이 없을 텐데.. 어디서 비롯된 지 모를 포근하고 나른한 느낌, 그건 행복이었다.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홍해인(김지원 분)은 그래서 ‘해 줄 수 있는 것 다 해 주겠다’는 백현우(심수현 분)의 제안에 “난 그냥 고장 난 헤어드라이어로 머리 말려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라고 답했다.
현우가 “겨우?”라고 되물어 왔을 땐 “왜 겨우야. 이거 해 주려면 매일 내 곁에 있어야 될 텐데.. 지금은 이거 보다 더 욕심 부리면 안될 것 같아.”라 말해주었다.
처음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혀만 내밀어도 닿을 것 같았던 ‘1조 클럽’이 아쉬웠었다. 사놓고 입어보지도 못한 리미티드, 사놓고 가보지도 못한 섬들, 작가 죽으면 오를 거라고 소장해 둔 예술품들이 눈에 밟혔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깟 것들 모두, 그때도 제일 아까웠던, 현우 손에 들린 고장 난 헤어드라이어에 비하면 ‘겨우’가 돼버렸다.
현우의 헤어드라이어 만큼은 아니지만 ‘1조 클럽’ 등등을 ‘겨우’로 만들 가치들은 해인의 주변에 뜻밖에도 많았다.
해인의 발병이 제가 지닌 부적 탓이라며 발기발기 찢어버리는 동생 수철(곽동연 분)의 치기어림, 친구 의사들이 전 세계에 깔렸으니 걱정 말라는 아빠 홍범준(정진영 분)의 흰소리, 그저 묵묵히 바라봐 주는 시댁 식구들의 걱정어린 시선, 그리고..
의사도 아니면서 해인의 병이 자기 탓이라 단정 짓는 엄마 김선화(나영희 분)의 가당찮은 착각. 그 착각 속에서 엄마는 “말 안해줬다고 자식 죽을 병 걸린 것도 모르는 게 엄마야?”라 자책했고, “내 마음이 힘들고 지옥이라고 그걸 내 새끼한테 풀고 있었으니..”라며 스스로를 한심해 했으며, “그 어린 게 손 내밀 때마다 한 번을 안잡아줬었어.”라며 가슴을 쳤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기 때문이란다. 자기 같은 엄마 만나서 속 끓이고 스트레스 받아서 병을 얻었단다.
“엄마가 의사야? 의사도 모르는 걸 엄마가 다 알아? 내 병은 원인도 모르고, 예방법도 없고. 스트레스 받는다고 생기고 그러는 것도 아냐!... 그리고 나 같은 딸, 엄마도 힘들었을 거야. 그러니 다 엄마 잘못도 아냐!”하고 돌아설 때 “혜인아!”하며 옷깃을 잡아주던 손길. 살아오도록 한 번도 먼저 내밀어진 적 없던 엄마의 손길이 전하는 안도감의 가치를 얼마로 환산할까. (하염없이 구르는 눈물 포함 그간의 설움, 격동, 안도등 온통 울컥한 심정으로 범벅된 얼굴을 하고 홍해인 특유의 정 없는 말투를 구사한 김지원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여기에 홍해인 컴백을 믿고 6개월 할부로 백화점 정장을 구입했으니 할부기간 끝나기 전 돌아오라는 나비서(윤보미 분)의 억지까지.. 부채도 자산이니 그 말 끝에 따뜻하게 안아오는 나비서의 정장값만 해도 홍해인에겐 1조 클럽, 리미티드, 섬, 예술품 따위를 ‘겨우’로 만드는 가치가 되어버렸다.
그런 무수한 아까운 것들 때문이라도 절절히 살고 싶은데..
처음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의사는 말했었다. 기억 소실, 감각 능력 소실, 언어장애 등의 증상이 나타날 거라고. 당시의 혜인은 ‘그건 남들 얘기일 것’이라 코웃음 쳤었다.
하지만 최근 동생 홍수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치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병실을 찾지 못해 헤맨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점점 홍해인이 아닌 누군가가 되어가는 기분은 끔찍했다.
특히 이 남자, 내 남자 백현우까지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래서 마지막 순간 자신을 지켜 보게 될 백현우를 보며 ‘누구지?’하는 의구심만 품은 채 타인으로 떠나야 된다면?
홍해인은 그렇게 백현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부정한 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백현우의 눈동자에 맺힐 마지막 모습이 ‘낯선 여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백현우에게 말했다. “난 당신이랑 이 다음까진 함께 안하고 싶어. 지금은 딱 이 정도만 행복하고 나중에 내가 더 나빠졌을 때, 그땐 당신이 내 옆에 없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그렇게 해인이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했을 때, 죽어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백현우의 눈동자는 갈피를 잃었고, 말문 막힌 입술은 애 마르게 움찔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너무 빨리 와버렸다. 백현우와 함께 홍만대(김갑수) 회장의 비자금을 추적하다 도착한 물류창고. 현우와 해인이 빠져나왔을 땐 비가 오고 있었다. 현우는 차를 가지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고 너무 빨리 돌아와 해인을 픽업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차를 맹렬히 추적하다 기필코 앞을 가로막는 차.
그 차에서 내린 것은 또 다른 현우였다. 그제서야 운전석을 돌아보는 해인. 자신이 현우로 착각했던 인물이 윤은성(박성훈 분)임을 비로소 알게 됐다. 해인이 걱정하던 그 순간, 현우가 막고싶던 그 망할 순간이 이미 와 버린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희망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현저히 낮은 백혈구 수치 때문에 독일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홍해인의 백혈구 수치가 두 배로 늘었다. 독일서 1500 마이크로리터였던 것이 3000까지 상승했다. 4000마이크로리터부터는 치료가 가능해진다. 백혈구 수치가 수능점수 올리듯 열심히만 한다고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이 모두 하나가 돼서 홍해인 백혈구 수치 늘리기 총력전에 나설 기세니 희망을 놓을 단계는 아니다.
사람을 향한 사람의 마음은 더러 기적도 일으키는 법이다. 눈물은 비탄의 순간뿐 아니라 환희의 순간에도 넘쳐 흐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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