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개혁, 국회로 공 넘겼으면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4. 4. 1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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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헨리 키신저 미국 대통령 국가안보 보좌관과 레 둑토 북베트남 정치국원이 평화협상 세션 뒤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게 된다. 1973. 6. 13.[사진 = AP 연합뉴스]
의료개혁 문제를 생각하다 밤잠을 설친 적이 있다. 이런 걸 두고 ‘오지랖 넓다’고 한다. 그러나 관심을 안 가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말똥말똥하게 누워 떠올린 생각은 ‘영락없는 베트남이로구나’다.

베트남전의 기원은 트루먼 정부의 인도차이나 정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트루먼은 아시아가 도미노처럼 공산화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인도차이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후임인 아이젠하워는 그 틀을 그대로 이어받아 남베트남을 지원했다. 케네디에 이르러 마침내 미군이 본격적으로 파견되었다. 수렁의 시작이었다. 후임 존슨 행정부가 그 수렁에서 익사했고 닉슨은 살기 위해 인도차이나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것은 미국의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김대중 정부의 의약분업에서 시작해 박근혜 정부의 원격의료 추진, 문재인 정부의 의대 400명 증원 시도를 거쳐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2000년 이후 크게 4번의 의정 충돌이 있었다. 4번 모두 의사들은 집단행동으로 정부를 코너로 몰고 갔다. 이번에도 항복하면 대한민국의 트라우마가 될 것이다.

베트남전은 이전에 미국이 경험했던 전장과 달랐다. 그것은 게릴라를 상대하는 전쟁으로 승리의 개념이 모호했다. “게릴라군은 패배하지 않는 한 승리한다. 전통적인 군은 결정적으로 승리하지 못하는 이상 패배할 수밖에 없다.”(키신저, 「외교」). 1966년 팜반둥 북베트남 총리는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훨씬 강력하지만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베트남인들이 베트남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정부가 의사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킬 방법은? 그런 건 없다. 도망간 전공의를 구속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한다고 겁을 먹지도 않을 것이다. 정부는 고작 명분을 위해 싸울 뿐이지만 저들은 평생이 걸린 직업 이익을 위해 싸운다. 결전의 강도가 다르다. 정부는 미군, 의사는 이념으로 똘똘 뭉친 게릴라다.

1973년 1월21일 프랑스 파리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레둑토 북베트남 측 협상대표가 휴전 합의에 서명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 AFP 연합뉴스]
닉슨 행정부 들어 미국은 끊임없이 북베트남에 대화를 요청했지만 북베트남은 대부분 회피했다. 오직 미국이 폭격을 재개하거나 북베트남 항구를 봉쇄할 때 같은 위기 국면에서만 교섭에 응했다. 당시 미국의 협상창구는 키신저, 북베트남은 레둑토였다. 어렵사리 파리에서 만났지만 레둑토는 벽창호 같았다. 미국의 휴전 제안에 앵무새처럼 무조건 미군 철수만 되뇔 뿐이었다. 북베트남은 시간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고 미국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각오가 돼 있었다.

지금 의사 진영에는 호치민도 없고 레둑토도 없다. 전공의 대표 박단이 뭘 결정할 수 있는 구도가 아니다. 의협 회장에 대표권이 있지도 않다. 도처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은 이해와 이념만을 공유할 뿐 누구에 의해 대표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자기들편이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에서도 그랬듯이 베트남 전쟁이 질질 끌면서 미국의 국내적 컨센서스가 무너져 내렸다. “미국 국민은 정부에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즉,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면서도 미국이 항복하지 않기를 원했다.”(키신저). 반전 시위가 격화돼 존슨은 자기 당 전당대회에도 참석하지 못할 지경이었고 의회는 냉담해졌다.

여당의 총선 패배와 의대 사태를 연결하는 일부 논자들의 견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여론은 변덕이 심하다는 것이다. 여론은 당위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편의에 의해 구속된다. 미국이 할 수 있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던 옵션으로 북베트남을 초토화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정부가 모든 것을 건다면, 의사들을 더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정부도 위험해진다.

“베트남은 대통령이 행정부의 명령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격렬한 시위, 일방적 철수로 조금씩 옮겨가는 의회 결의안, 그리고 적대적인 언론...” 키신저는 닉슨이 임기 초에 의회를 방문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고 그것을 승인해 달라고 요구했어야 했다. 만약 승인을 받아낼 수 없었다면 이 전쟁을 청산하는 표결을 해달라고 요구해서 의회가 책임을 지게 했어야 했다.” 닉슨은 그것을 행정부의 책임을 포기하는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의대 증원은 입법 사안이 아니므로 여기에 국회를 끌어 들어야 할 형식적 당위는 없다. 그러나 이 사안은 형식을 따지기에는 너무 커져 버렸다. 국민건강을 넘어 국가의 권위와 민주주의의 본질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막가기 전에 국가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하고 그 시스템의 한 축인 국회가 당사자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2025학년도 의대 증원 2000명을 무산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대로 진행해야 한다. 2026학년도 이후 의대 정원에 대해서는 국회 주도의 특위를 구성해서 결정했으면 한다. 단순한 정원 결정이 아니라 의료개혁 전반을 다루고 장차 의사 수급을 어떤 원칙과 로드맵에 의해 결정할지를 가능하다면 법으로 명시했으면 한다.

야당에게도 이 문제는 중요하다. 문제를 회피할 수는 있어도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장차 야당이 집권했을 때 이 문제가 어떻게 발화해서 무엇을 태울지 누가 알겠나. 그 위험을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 헤징하려면 지금 약간의 책임을 떠안는 것이 유리하다. 다음 지방선거 때까지 아직 2년이 남았다. 선거로부터 자유로운 시점에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의사들이 행정부에 이어 국회의 대화 제안마저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이고 또 다른 차원의 도전이다.

키신저는 베트남전 교훈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떤 사회를 시험해보려면 그 사회가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이견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힐 수 있는지, 갈등이 아니라 화해를 통해 번영한다는 사실을 유념하는지 여부를 보면 된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의료개혁에서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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