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스러운 계집 목을 쳐라” 수백번 명령했지만...권력자도 꼼짝 못한 그녀들 [서울지리지]
무속은 세계 종교의 종합선물세트다. 모든 종교는 여러 종교와 습합(習合·융합)을 통해 발전했지만 타종교 수용에서 무속만큼 적극적인 종교도 없다. 무속의 신은 동서고금을 망라하며 토속종교와 유불선을 넘나든다. 천신, 지신, 수신, 바람신 등 자연신을 비롯해 부처·보살, 원효, 나옹, 사명당 등 불교 여러 신과 승려, 중국·한국의 역사영웅 등 신앙 대상의 한계를 가늠키 어렵다. 최영, 남이, 임경업 등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장군들도 중요하게 숭배하며 최근에는 맥아더, 박정희도 끌어들인다.
나라에 망조가 든 고종(1852~1919·재위 1863~1907)의 시대에는 뜬금없이 관우신앙이 풍미했다. 고종비 명성왕후 민 씨(1851~1895)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1820~1898)과 극단적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 병적으로 미신에 집착했다.
명성왕후가 1866년(고종 3), 16세에 고종과 혼인해 8년 만에 가진 순종(1874~1926)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다. 심지어 <매천야록>에 의하면, 순종은 발기불능에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싸는 희귀병을 앓았다. 자신과 친정을 지켜줄 귀한 아들을 위해 무엇을 아끼겠는가.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아들만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회를 열었다. 영험하다는 무당은 모두 동원됐고 가는 곳마다 천문학적인 나랏돈이 뿌려졌다.
1882년(고종 19) 구식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왕후는 친정집이 풍비박산 났다. 그녀마저 궁녀차림으로 장호원까지 몰래 도망쳐 겨우 목숨을 보전했다. 이때 왕후는 용하다는 이 씨 무녀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불렀다. 이 씨 무녀는 명성왕후가 곧 대궐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사이 청나라가 개입해 반란을 진압하면서 명성왕후는 피란 50여 일만에 환궁했다. 예언이 적중했다고 믿은 명성왕후는 무당을 궁궐로 데려왔다. 무당은 자신이 관우의 영을 받은 딸이라며 왕후를 현혹해 송동(宋洞·혜화동 서울과학고)에 관우사당인 북관묘(北關廟)를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고종은 ‘진실로 영험하다’는 뜻의 진령군(眞靈君) 작호까지 내렸다. 진령군은 명성왕후의 전속무당으로 왕후를 위해 수시로 점을 치며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의식있는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국왕은 외면했다. <고종실록> 1894년(고종 31) 7월 5일 기사에 의하면, 형조참의 지석영(1855~1935)이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대하여 온세상 사람들이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 … 상방검(尙方劍·임금이 보검)으로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 문에 매달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매천야록>은 1906년(광무 10) 12월 진령군이 죽었다고 기술한다.
이능화(1869~1943)의 <조선무속고>는 “현령군이 받드는 관묘는 이궁동에 있었는데 세상에서 이궁대감 전내신(殿內神·관왕)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진령군은 왕비의 명령으로 송동의 북묘에 거주하였으며 세상에서 진령군 대감이라 하였다”고 했다. 서묘는 1909년(융희 3), 북묘는 1913년, 각각 동묘(東廟·종로 숭인동)로 합사돼 철거됐다.
이 둘이 끝이 아니었다. <조선무속고>는 “이 씨, 윤 씨 뒤에 또 수련(壽蓮)이라는 여자 무당이 있어 대궐을 출입하며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의례를 했고, 두 아들은 모두 고관이 되었다”고 했다.
원경왕후는 1420년(세종 2) 5월 27일 학질에 걸린다. 왕후는 사경을 헤맸지만 아들(세종대왕·1397~1450·재위 1418~1450)을 시켜 매일 야행을 하며 가는 곳마다 전국의 이름난 술사와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벌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6월 24일 세종은 원경왕후와 송계원(松溪院·묵동의 국립여관) 냇가로 행차했다. 황해도 곡산의 홍흡와 방술사 을유가 학질을 다스리는 비술을 행했다. 26일에는 선암(繕巖) 아래 물가로 옮겨 장막을 치고 무당에게 기도하게 했으며 새벽에 두어 사람만 대동한 채 몰래 혜화문으로 들어와 흥덕사(興德寺·서울과학고)에 머물렀다. 실록은 “(왕과 대비가) 밤마다 행차를 옮기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고 했다. 세종은 귀신을 피해 다니며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하늘도 감응해 병이 낫겠거니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후는 병에 걸린지 한달 보름만인 7월 10일 운명한다.
무속은 여인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조선은 유교국을 천명했지만 놀랍게도 국가가 주관해 무속의례를 행하는 성수청(星宿廳)을 별도로 뒀다. 성수청은 국무(國巫·나라 제사를 담당하는 무당)가 소속돼 왕실의 안녕, 기우(祈雨)와 기청(祈晴) 등의 국가제사를 행했다. 사림들이 중앙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한 성종(1457~1494·재위 1469~1494)의 치세에 성수청 폐지 논쟁이 뜨거웠다. <성종실록> 1478년(성종 9) 11월 30일 기사에 따르면, 홍문관 부제학 성현(1439~1504)이 상소를 올려 포문을 연다. 그는 “간사스럽고 음란하고 요망한 것들이 성명(聖明·성군) 아래에서는 용납되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다. 경국대전을 반포해 유교 통치시스템을 완성한 성종이었지만 이같은 사림의 요청을 거부했다.
성수청은 성종의 아들 연산군(1476~1506·재위 1494~1506) 때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다. <연산군일기> 1505년(연산 11) 2월 22일 기사에서 연산군은 “성수청에 성을 쌓아 문을 내고 임숭재(1475~1505·연산군때 간신)의 집 북쪽에도 작은 문을 내어 서로 통하게 하라”고 했다. 이어, 1506년 3월 6일 연산군은 “성수청 도무녀(都巫女·으뜸 무녀)와 이하 무녀의 잡역을 면하라”고 명했다.
남산과 북악산에도 나라 굿당이 설치됐다. <태조실록> 1395년(태조 4) 12월 29일 기사는 “이조에 명해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나라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했다. 남산 굿당은 국사당(國師堂·현재 팔각정)으로 불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국사당에서) 기도가 자못 성행하여 나라도 금하지 못했다”고 했다. 1925년 일제가 국사당 아래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현재의 인왕산 선바위로 이전했다.
국가 관청에 성기(性器)를 숭배하는 사당도 존재했다. 청사 별로 내부에 부근당(付根堂)을 별도로 마련해 부근신을 모셨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서울에는 관청마다 신사(神祀)가 있으니 이름하여 부근당이라 한다. 이것이 와전되어 부군당(府君堂)이라고도 한다. 한번 제사하는 비용이 수백금이나 된다. … 네 벽에 남자의 성기처럼 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많이 매달아놓았는데 심히 음란하고 외설적이었으며 … ”라고 했다.
최첨단 과학의 시대인 요즘, 뜻밖에도 무속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MZ세대들이 미래가 불안하다며 신점·사주를 찾는다고 한다. 인간이 나약한 존재임을 새삼 느낀다.
<참고문헌>
1. 조선무속고 : 역사로 본 한국무속. 이능화(서영대 역주). 창비. 2008
2. 한국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현상. 한국불교학 제75집. 장정태. 한국불교학회. 2015
3. 조선왕조실록. 매천야록(황현). 소호당집(김택영). 좌계부담. 연려실기술(이긍익). 오주연문장전산고(이규경)
4. 조선후기의 무속. 한국무속학 제17집. 손태도. 한국무속학회. 2008
5. 도시와 무속 : 서울굿을 중심으로. 실천민속학연구 제9호. 홍태한. 실천민속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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