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손효림 기자 2024. 4. 1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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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생에 대해 ‘뼈를 때리는’ 돌직구를 날리는 책,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다. 지난해 9월 출간돼 7개월 만에 30판 부 넘게 판매됐다. 철학서가 주요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쇼펜하우어 신드롬’을 이끈 책이기도 하다. 행복은 고통을 줄이고 피하고 견디는 것에 있다며, 고통을 해소하고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는 쇼펜하우어의 조언을 30가지로 정리했다. 독자들은 “마냥 괜찮다며 위로를 주는 책에 지쳐 있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며 열광했다.
출간 7개월 만에 30만 부 넘게 판매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유노북스 제공
저자인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55)은 고려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서양 철학을 전공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쓴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지호영 기자 f3young@donga.com
강 연구원은 2022년 초, 이현정 유노북스 기획편집팀장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책을 쓰게 됐다. 강 연구원과 이 팀장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이 팀장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쓴 책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강 연구원은 “너무 어려울 것 같다”며 거절했지만, 거듭된 이 팀장의 요청에 일단 출간을 수락했다. 하지만 중간에 두 번이나 집필을 중단할 정도로 글쓰기는 만만치 않았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편집자인 이현정 유노북스 기획편집팀장.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 팀장을 2일 서울 마포구 유노북스에서 만나고, 강 연구원을 3일 전화 인터뷰해 책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들었다. 기자는 이 팀장을 만나기 전 그가 40대이거나 적어도 30대 후반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뜻밖에도 앳된 얼굴의 1990년생이었다. 올해 34세다. 책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유노북스에서 ‘50에 읽는 논어’(2021년), ‘50에 읽는 장자’(2022년) 등이 출간됐어요. ‘50에 읽는 논어’는 25만 부 넘게 판매될 정도로 50대 시리즈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40대를 떠올렸어요.”

한국인 중위 연령이 40대라는 것도 고려했다.(올해 기준으로는 46.1세)

“그런데 어떤 내용을 담아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하니 그저 따뜻한 말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어요. 당시 쇼펜하우어의 문장이 소셜미디어에 많이 공유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어요. 굉장히 직설적이었죠.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삶을 예리하게 간파한 사람이 궁금해졌어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주제로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쇼펜하우어. 유노북스 제공
필자를 찾기 시작했다. 철학서를 쓴 국내 저자들을 파악했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2014년)을 쓴 강 연구원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강 연구원이 쓴 ‘니체가 들려주는 슈퍼맨 이야기’(2007년·자음과모음)를 보며 그가 가장 적확한 저자라고 판단했다.

“강 선생님에게 연락드리니 ‘나는 논문을 써 온 사람이어서 집필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고사하셨어요. 여러 필자들의 목록을 작성하긴 했지만 다른 필자는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강 선생님에게만 제안했어요. 선생님이 ‘철학이 전문서에서 머무는 것을 넘어 대중에게도 쉽게 다가가는 학문이 되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머릿속에 맴돌았고요. 출간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약간의 여지를 남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이 팀장은 철학의 대중화가 필요하다며 강 연구원을 6개월 가까이 설득해 마침내 수락을 받아냈다. 강 연구원이 쇼펜하우어에게 영감을 받아 철학을 전공하게 된 점도 파고들었다. 강 연구원은 “이 팀장은 포기라는 걸 모르더라”며 웃었다.

하지만 목차를 만들고 글쓰기가 시작되면서 진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처음 원고를 보내니 이 팀장이 한숨을 쉬더라고요.(웃음)”(강 연구원)

“내용이 딱딱하고 어려워서 이해가 잘 안 됐거든요. 선생님은 쇼펜하우어 책을 원서로 다 보셨기 때문에 방대한 내용을 압축하고 쉽게 쓰기가 더 힘드셨을 거예요.”(이 팀장)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건 쉽게 쓰는 것이다. 가령, 마음의 평정을 찾는 네 가지 방법으로 쇼펜하우어는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질투를 경계하며 △큰 희망을 걸지 말고 △세상에는 거짓이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이처럼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술술 읽히는 이 책은 격렬한 산고 끝에 나왔다.

강 연구원이 원고를 보내면 이 팀장은 “이 문장은 40대가 어떤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을까요?”, “이 내용은 이해가 안 되는데 더 풀어 쓰실 수 있나요?”라며 하나하나 짚어가며 물었다. 수없이 원고가 오가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강 연구원은 “논문 글쓰기에서 쉬운 글쓰기로 넘어가는 게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애써 쓴 내용을 통째로 빼자고 할 때면 “이게 내 책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지쳐가던 강 연구원은 존경하는 선배가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나자 무너졌다.

“제 글을 인정해주신 유일한 분이었어요. 제게 ‘잘 될거다’라며 확신을 주셨고요. 그런 형이 떠나시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강 연구원은 이 때를 포함해 책을 쓰다 두 번 ‘잠수 탔다’고 말했다. 이 팀장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보통 ‘잠수 탄다’고 하면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는 걸 말하잖아요. 어디 있는지 위치 파악도 안 되고요. 선생님은 집필을 멈추고 연락을 안 하셨을 뿐이에요. 한두 달 뒤에 제가 연락하면 전화는 받으셨어요. 마음이 바뀌셨는지 조심스레 여쭤봤죠.”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쓴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지호영 기자 f3young@donga.com
계속 기다리는 이 팀장을 보며 강 연구원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강 연구원은 “이 팀장은 엄청나게 집요하다”며 웃었다. 처음 만난 저자를 이처럼 기다린 이유가 뭘까.

“1차 원고를 보니 마음이 가는 걸 느꼈어요. 제 마음 속 힘들고 고통스러운 게 움직였다고 할까요. 저자 중에는 글을 고치는 걸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선생님은 ‘출판은 이 팀장의 분야이니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 하신 게 큰 힘이 됐습니다. 글은 저자가 쓰고, 저는 ‘요구하는 사람’인데 요구하는 건 쉽잖아요. 이를 모두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편집자인 이현정 유노북스 기획편집팀장.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강 연구원은 메일이나 문자를 주고받을 때면 “고맙습니다”, “이 팀장님 덕분입니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 팀장은 “늘 칭찬과 격려를 해주시고, 스스로를 낮추는 선생님을 보며 많이 배우고 힘을 낼 수 있었다”고 했다.

2023년 9월이라는 출간 시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맞추려 했다. 8월은 너무 덥고, 연말에는 책이 상대적으로 주목받기 어려울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출간 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우 하석진이 이 책을 읽는 모습이 나와 화제가 된 것도 도움이 됐다. 하석진은 “인생은 혼자다. 혼자서도 단단해질 줄 알아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했고, 전현무 역시 “나도 이 책을 읽고 있다”고 밝혀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책 자체가 힘을 갖지 못하면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사랑받기 어렵다. “1만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요즘 출판계에서 7개월 만에 30만 부 넘게 팔린 건 놀라운 일이다. 책 판매 속도는 꺾이지 않고 지금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책에는 강 연구원의 생각이 많이 들어 있다. 이는 이 팀장의 아이디어였다.

“저자의 생각이 녹아있어야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삶과 연결짓고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이 팀장)

강 연구원은 50세가 넘어 책을 쓰게 된 것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10년 전이라면 이렇게 못 썼을 것 같아요. 교만하거나 얕게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40대를 지나고 50대가 돼 보니, 인생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고 애썼다고 해서 다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달았거든요. 쇼펜하우어는 마흔 살 무렵 헤겔에게 눌려서 직장도 잃고 강아지와 살았습니다. 잘 풀린 건 그 이후부터였죠. 그런 경험이 그의 철학에도 반영됐다고 봅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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