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의 계절…가수 배일호의 가방 속에는?[왓츠인마이백⑧]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 왔다. 꽃놀이에 빠질 수 없는 축제, 그리고 축제에 빠질 수 없는 초대 가수다. KBS <전국노래자랑>의 국민 MC였던 고 송해씨는 그의 히트곡에 빗대어 그를 ‘순도 99.9의 신토불이 가수’라고 불렀다. 전국 방방곡곡 행사 대목이 시작됐다. 배일호씨의 행사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신토불이’로 행사의 왕 되다
가수 배일호씨는 경향신문사에 들어서면서 20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경향신문 건물 내에 있던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을 방문했던 일이다. 히트곡 ‘신토불이’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절 그는 산케이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구로다 기자가 인터뷰 도중 ‘신토불이라는 표현이 본래 일본 것이라는 걸 알고 있냐’고 묻더라고요. ‘무슨 말이냐. 우리나라 허준 선생님이 쓴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말’이라며 인터뷰 중 설전을 벌였던 기억이 나네요.”
‘신토불이(身土不二)’는 사람의 몸과 그 몸이 태어난 땅은 둘로 나눌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모든 존재가 동등하다는 의미가 담긴 불교 용어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동의보감>에는 ‘사람의 살은 땅의 흙과 같다’는 구절이 있다. 신토불이가 일본 것이라는 주장은 “일본 덕에 한국이 잘 살게 됐다”는 말만큼이나 허황된 구로다 기자의 또 다른 망언이었다.
배일호씨는 벼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평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나간 군산 지역 방송국 서해방송의 ‘가수왕 선발대회’에서 1등을 한 후 가수로 데뷔했으나 오랜 시간 무명에 머물렀다. 그를 행사의 왕으로 등극시킨 ‘신토불이’는 그가 어느 날 농협 달력에 조그맣게 쓰여 있는 ‘신토불이’라는 단어를 발견한 뒤 가사를 붙여 만들었다. 1990년대 초반 다자간 무역협정인 우루과이 라운드가 체결되고 수입 농산물이 국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토불이’는 농민에게는 시름을 위로하는 응원곡이었고, 대중에게는 ‘우리 농산물을 먹어야 한다’는 캠페인송이 됐다. 배씨는 지역 특산물 축제의 주요 무대를 독차지했다.
본격적인 행사철이면 그는 서울에서 대전과 부산 그리고 광주와 익산을 ‘찍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빽빽한 일정을 당일에 소화하곤 했다. 하루 1000㎞씩 달리다 보니 아무리 새 차라도 3년 이상 타지 못했다. 10년간 비행기를 탄 횟수만 1600번이 넘는다. 하루에도 여러 축제 무대에 서다 보니 지명을 혼동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울진 대게축제 무대에 올라 앞서 방문한 영덕 축제와 혼동해 ‘영덕 대게’를 외치기도 했다.
“지명을 외치면 으레 환호성이 나와야 하는데 사람들 반응이 이상하더라고요. 소리가 작았나 싶어 다시 ‘영덕 대게 만세’를 외쳤어요. 관객석에서 ‘응~ 영덕으로 가!’라는 소리가 들렸고, ‘아차’ 싶었죠. 용서를 빌면서 울진 대게 한 박스를 사가겠다고 수습했지만 이후 그 축제에서는 저를 더는 불러주지 않더라고요. 제가 큰 실수를 한 거죠.”
촌각을 다퉈 이곳저곳을 누비다 큰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사고 이후 아무리 이동 시간이 길어도 차 안에서 잠이 들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20년 전 <전국노래자랑> 임실군 편 녹화 때였어요. 리허설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급히 가다가 정면에서 오는 트럭을 피하지 못하고 충돌해버렸어요. 뒤차도 추돌해 앞뒤로 충격을 받았지만 방송이 중요하니 일단 무대에 올랐죠. 긴장해서 아픈 줄도 몰랐나 봐요. 그날 저녁때가 되니 거동이 불편할 정도여서 뒤늦게 응급실을 찾기도 했죠.”
행사 가는 길, 그는 여전히 종이 지도를 본다
차 안에서 도통 잠들지 못하는 그가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있는데, 대한민국 전도다. 스마트폰으로 어디든 가장 빠른 길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종이 지도를 들고 목적지와 동선을 확인한다. 이는 그의 오랜 습관이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과거에는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다녔어요. 매니저가 운전하면 저는 옆에서 지도를 보며 ‘인간 내비게이션’ 역할을 했죠. 여전히 지도앱을 보는 것보다 실제 지도를 갖고 길을 찾는 것을 좋아해요.”
지역 행사를 다니면 팔도의 진미를 다 섭렵할 것 같지만, 속이 더부룩하면 노래 부르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무대를 옮겨 다니다 보니 끼니를 놓치기 일쑤다. 그래서 간식을 꼭 지참하는데, 추억의 간식 강냉이와 건빵이다. 이동 중에 가볍게 먹고 무대에 오르기 좋다. 파운데이션과 콤팩트 , 아이브로펜슬 등 분장 도구도 유독 많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행사철에는 차 안에서 스스로 메이크업을 한다.
이동 시간을 알차게 쓰는 것에 도가 튼 그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체크하거나 유튜브로 강의를 듣는다. 취미인 성악을 연습하기도 한다. 독학으로 성악 발성을 공부하고 2020년 가곡 ‘봄의 향기’도 발표했다.
팬데믹의 여파 그리고 트로트계에 부는 젊은 가수 바람으로 행사 섭외가 예전만 못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건강한 현상’이라고 풀이한다. “‘정체’ ‘고인 물’이란 건 어떤 의미에서든 좋지 않아요. 젊은 친구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트로트 업계가 신선해지고 건강해졌어요. 식탁에 된장찌개만 있는 것보다 샐러드가 곁들여지면 풍성해지는 것처럼 트로트 중견 가수와 신인 가수의 어울림, 괜찮잖아요?”
배씨는 다급하고 위험천만했던 인생의 속도를 조금씩 줄여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자기 전 스스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동안 제 욕심으로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일에 빠져 살았는데 이제 좀 내려놓으려 해요.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너 참 고생했다. 대단하고 훌륭해. 그만 애써도 돼’라고 되뇌어요. 긍정적인 마인드로 하루를 마감하려고 하죠.”
코로나로 행사가 멈춘 기간, 그는 모든 시간을 부인과 함께했다. 서양화가인 부인과 그림을 그리며 부부 동반 전시회를 열고, 수익금은 좋은 일에 기부하기도 했다.
“빨래를 개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저 사람이 없었다면 내가 있었겠나. 잘해야겠다’고 절실히 느꼈어요. 평생 지역 축제를 위해 노래했는데, 이제 아내를 위한 축제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이유진 기자 88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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