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에게 용서 받지 못한 '구조 실패자'…법이 구원했다
[산 자들의 10년]
<1> 죄와 벌(하)
여객선 참사 '구조 본부장' 김석균, 10년만에 입을 열다
신이 아닌 이상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지기는 어려워요.
김석균은 단호했다. 그날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말했다. 2대8로 빗어 넘긴 곱슬머리와 브라운 톤의 뿔테 안경, 두툼한 입술. 점잖지만 고집스러운 관료의 얼굴을 한 그가 예상을 뛰어넘는 확고함을 보이자 당혹감이 느껴졌다. 김석균은 누군가로부터 이미 구원받은 듯했다. 그가 건넨 명함을 만지작거리다 무심결에 내려다봤다.
‘해양경찰학과 | 교수 | 행정학 박사 | 김석균’
수박 색깔의 대학 상징물 밑에는 현직만 단출히 적혀 있었다. 최선을 다했다던 그날의 직함은 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영문으로 쓰인 명함 뒷면을 보니 속내가 보였다. ‘Former Comissionner of Korea Coast Guard.’ 그가 살며 올랐던 가장 높은 자리다. 그럼에도 반쯤 감추고 싶은 이력. 행정고시 출신으로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지낸 차관급 해양경찰청장직은 김석균에게 이중적 의미일지도 모른다. 10년 전 그 일 때문이다.
304명이 죽은 날, 오보를 믿고 기립박수 친 해경 지휘부
그날 아침, 김석균은 인천 연수구 송도신도시의 해경 본청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양 어깨에 수놓아진 태극무궁화 4개. 조직에 하나뿐인 이 계급장은 그에게 큰 영예였다. 김석균은 수요일마다 현안점검회의를 주재했다. 하지만, 그날은 차장에게 맡겼다.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여유롭게 보고서를 뒤적였다.
오전 9시 24분, 상황담당관 임근조가 상급자인 김석균의 집무실로 예정 없이 뛰어들어왔다. 평온한 분위기가 깨졌다.
“청장님, 다수의 인명이 탄 여객선이 전남 진도 관매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 중이라고 합니다."
차라리 TV를 봤더라면 소식을 먼저 알았을 것이다. 뉴스전문채널이 5분 전 이미 속보를 띄웠던 터다. 사실 임근조도 침몰 보고를 20여 분 전에 받았다. 청장이 직접 지휘해야 할 사건이었지만, 공무원 일을 25년째 하는 임근조에게는 철칙이 있었다.
사안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청장님께 보고드리는 건 우리 문화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작 1시간이었던 '골든타임'(침몰 이후 사람을 구조할 수 있는 시간) 중 30분가량이 최고 지휘관도 모르는 새 날아갔다. 두 사람은 6층 상황실로 뛰어올라갔다.
이후 상황은 세상에 알려진 그대로다. 무게 6,825톤의 대형 여객선은 속절없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해경은 헬기 3대와 함께 경비정인 123정을 급파했다. 13명이 탄 작은 배였다. 정장 김경일은 여객선에 접근하면서 상상했다. 갑판 위에서 다급히 손을 흔들거나 구명조끼를 입은 채 바다 위에 떠 있을 승객들을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선내에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들은 탓이다.
그럼에도 해경은 선체 진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대신 눈에 보이는 사람들 위주로 경비정에 옮겨 태웠다. 현장 지휘관인 김경일이 대공 마이크로 승객들을 향해 "탈출하라"고 명령했다면 어땠을까. 이제는 무의미한 가정이 됐다. 배에 타고 있던 476명 중 304명이 사망했고, 172명만 구조됐다. 그나마 100명 가까이는 민간 어선과 관공선 등이 구했다. 해경선에 올랐던 사람 중에는 선장 이준석과 선원 15명도 있었다. 도주한 사람들이었다.
김석균은 상황실에서 "현황 파악이 왜 이리 늦느냐"며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 또, 상급자인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중앙구조본부장인 그는 초조해하며 부하들의 보고를 받았을 뿐, 구조 과정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수백㎞ 떨어진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라 현장에 맡기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결국 모든 책임은 대형 여객선 조난 훈련을 받아 본 적도 없는 말단 간부 김경일이 짊어져야 했다.
김경일이 온전히 구조에 집중하도록 놔뒀다면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해경 지휘부는 그런 인내심조차 없었다. 영상과 사진을 촬영해 보고할 것을 거듭 재촉했다. 승객을 구할 수 있는 최후의 시각으로 향하던 때다.
오전 10시 30분, 여객선은 머리만 수면 위로 내놓은 채 침몰했다. 그러나 30분 뒤, 해경 본청 상황실에서는 때아닌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TV에서 '여객선 승객이 전원 구조됐다'는 오보가 나오자 지휘부가 다 함께 일어서 감격한 것이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해경 해체,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결론 내렸습니다."
20여 일 뒤, 김석균은 진도 앞바다의 3009함에서 TV로 대통령 박근혜의 대국민담화를 들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1년여 전 자신을 임명하며 힘을 실어줬던 대통령이었다. 61년 된 조직의 문을 닫고 나온 수장. 해경 역사상 두 번째로 내부승진한 청장이라는 명예가 오명으로 수직낙하할 판이었다.
여객선 참사 유족 장훈은 김석균을 '정치적인 사람'으로 기억했다.
"국정감사 때 국회 화장실에서 마주쳤는데 그 난장판에서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얼굴을 정돈하던 모습이 떠올라요. 국회의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 같았어요."
김석균은 대통령의 발언 이후 입장을 빠르게 내놨다.
"해경 전 직원은 국민들과 대통령님의 뜻을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직원들은 격앙됐다. 정권이 비난을 피하려 '정치적 결정'을 했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는데도, 반발조차 하지 않는 수장의 태도에 분노한 것이다. 그는 2014년 11월 조직을 떠난다.
김석균은 해경을 떠난 뒤 입을 꾹 닫고 야인으로 살았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 불러주는 곳을 찾아다니며 강사 일을 했다. 행정고시 37회 동기 중 가장 빨리 차관급에 올랐던 그는 당시를 '유배 시절'로 기억했다. "선조들이 유배지에서 책 읽고 버텼듯 나도 누가 과제를 준 것도 아닌데 책과 논문을 쓰며 견뎠다"는 것이다.
돌아온 김석균 "잘 몰라서 하는 얘기죠"
김석균과 마주 앉았다. 지난 3월 13일 충남 서산의 대학 연구실. 그는 참사 10년 만에 처음으로 언론사 기자와 단둘이 만났다. 해경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해양경찰학과 행정학 등을 가르치고, 법무법인 고문역도 맡고 있었다. 해양 안전 사건 등을 자문해주는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 말할 준비가 돼 보였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것이 계기가 됐다. 법원은 김석균과 함께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됐던 해경 지휘부 9명에게도 죄를 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선장과 선원의 도주나 배의 급속한 침몰을 예상할 수 없었기에 구조 실패를 범죄로까지 보긴 어렵다"는 취지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날 선 질문을 받고도 조목조목 자신과 동료들의 무고함을 토로했다. 구조에 실패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뭍에서 본 시선으로 바다 위 상황을 재단하지 말라는 논리를 폈다.
“사람들은 해경이 퇴선 명령을 했다면 인명피해가 없거나 적었을 것이라고 말하죠. 몰라서 하는 얘기예요. 해경 123정이 도착했을 때, 그 배는 이미 50~60도 기울어졌어요. 6층 높이인 배예요. 선장이나 선원이 안내도 안 해주는데 승객들이 순조롭게 나오기는 어려웠어요."
그의 말처럼 해난 사고 때 1차적 구조책임은 선장과 선원들에게 있다. 그래서 그들을 어떻게든 찾아 배 위에 놓아뒀어야 하는 게 김석균이 이끈 해경의 임무였다. 하지만, 해경은 오히려 선장과 선원의 도주를 도왔다. 기름때 묻은 파란색 스즈키복(선원복)을 입은 채 해경정에 올라탄 선원들도 있었다. 어떻게 몰랐을 수 있을까. 김석균이 말했다.
“저도 나중에 사진 보고 스즈키복 입은 걸 알았어요. 그때 경황이 있었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하는데.”
그는 시종일관 담담히 답했지만 종종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털어놓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감정 변화가 가장 선명했던 순간은 기자가 '김경일'이라는 이름을 꺼냈을 때였다.
"만약 김경일 정장도 우리와 같은 때 재판을 받았더라면···."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 이어갔다.
"김 정장이 재판받을 때만 해도 국민적 공분이 워낙 컸으니까요. 그 사람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역할을 했어요. 한번 만나 위로해주고 싶어요. 물론 법원 판결이 난 마당에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겠지만요."
'구원'받지 못한 자, 김경일은 침묵했다
김경일은 법원에서 '구원'받지 못했다. 그는 구조 실패의 책임을 지고 형사처벌을 받은 유일한 해경이다. 맡은 업무를 잘못해 승객 300여 명을 죽게 한 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2019년 출소했다. 지금은 전남도에서 낙도를 오가는 여객선에 급히 선장이 필요할 때마다 '땜빵'으로 일하고 있다. 홀로 처벌받은 상황에서 할 말이 없을까 싶어 기자들이 수차례 찾아갔지만, 도망치다시피 피했다. 3월 13일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문틈으로 얼굴을 내민 한 여성은 기자에게 명함을 건네받자 문을 닫아 버렸다.
장훈에게 김석균과 김경일은 모두 용서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다만, 유족 입장에서 두 사람은 다름이 있다고 했다.
"김경일이 '배가 작아서 모두 구조할 수 없었다. 할 만큼 했다'고 말한다면 용서는 안 되지만 굳이 이해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김석균은 달라요. 책임자로서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요."
그렇다. 해경 조직이 구조에 실패했다면 그 책임은 수장이 짊어져야 한다. 형사적으로 처벌을 받았든, 안 받았든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2014년 4월 16일 창백한 얼굴로 김석균의 집무실로 뛰어들어가 "청장님"을 찾았던 임근조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그는 2019년 검찰에 불려갔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일단 전체 책임은 청장에게 있다고 봐야죠. 해경 지휘부는 현장 경험이 부족해 상황 파악이나 지휘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김석균은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최근 세월호 참사를 다룬 책을 썼다. '잘못 알려진 부분은 바로잡고, 잘못한 부분은 반성하겠다'는 취지로 썼다고 했지만, 책에는 주로 억울함이 담겼다. 자신과 해경 동료들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불면증과 우울증 약을 먹는다고도 했다.
“책을 쓰려면 사고가 난 4월 16일 당일로 생각을 되돌려야 하죠. 너무 괴로운 일이었어요."
그가 떠올린 장면 중에는 참사 당시 헬기를 타고 진도 상공을 떠다니면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던 모습도 있을 듯했다. 당시 그 아래에는 혼절한 은인숙이 쓰러져 있었다.
<2회에서 계속 / 4월 15일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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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죄와 벌
- • 억세게 운수 좋던 날, 돈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0110330005911) - • 피해자에게 용서 받지 못한 '구조 실패자'…법이 구원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32807560000163) - • 선배 잘 따르던 착실한 딸이 범죄자로 돌아왔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2311040004625)
- • 억세게 운수 좋던 날, 돈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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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사라진 소년
- • "당신 탓이 아냐" 아내의 말에 남편은 10년만에 울음을 터뜨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32918380004819)
- • "당신 탓이 아냐" 아내의 말에 남편은 10년만에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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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서류를 찢다
- •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정치에 밀려난 과학, 아빠가 붙잡았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0509320000160)
- •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정치에 밀려난 과학, 아빠가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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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다시 쓰는 그날
- • "새가슴이냐" 압박하며 과적 지시…세월호 참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1416180002328) - • 정원 250명 배에 선원 4명뿐... '화물 고정·승객 통제' 안전관리 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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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남겨진 사람들
- • 벚나무 보며 슬픔 삭였는데…두 번째 딸도 떠났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1218100000913) - • 아들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영정 사진으로 끝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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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벚나무 보며 슬픔 삭였는데…두 번째 딸도 떠났다
유대근 기자 dynamic@hankookilbo.com
오세운 기자 cloud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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