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차 타고 오른 초행길…얼마 안가 눈 덮인 산골짜기가 [ESC]

한겨레 2024. 4. 1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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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일본 북알프스 시로우마산②
일본 북알프스 시로우마산의 거대한 설계(눈이 여름철에도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높은 산골짜기).

못 오르면 되돌아올 계획으로
버스 타고 1250m 지점 도착
2932m 정상까지 험로 예감

구글 지도를 열어 현재 내가 서 있는 편의점에서 숙소까지의 거리를 확인했다. 편도로 2.5㎞, 도보로 35분 정도 걸린다고 안내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밤 9시20분, 숙소 주인은 그때까지도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터미널에 도착하면 픽업을 나오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체크인 시각인 저녁 7시를 훌쩍 지났기에 그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좀 걷고 싶어서 길을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10시 전까지 잘 찾아가겠다고 답장했다.

24시 편의점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빠져나왔다. 숙소까지는 도로를 따라 쭉 직진하다가 200m쯤 남겨두고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지면 되었기에 찾아가기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쿠바촌의 밤거리는 고요하다 못해 적요했다.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그나마 인적이라면 이따금 간격을 두고 달리는 차량 정도였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가로등의 불빛 아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저 멀리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바야흐로 여름의 소리였다.

새벽 5시55분 첫차 타고

대여섯채의 집이 정답게 마주 보고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해 ‘하쿠바 카제 노 코(Hakuba Kaze no Ko)’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문을 찾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안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잠시 후 초로의 남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나에게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고, 하쿠바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했다. 그의 이름은 ‘코(Ko)’였는데 카제란 일본어로 바람을 뜻하니까 이 집은 해석하면 ‘코의 바람’이었다.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착안해서 지은 이름일까?

하쿠바촌에서 묵은 숙소 ‘하쿠바 카제 노 코’.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딘지 강렬한 뉘앙스를 풍기는 숙소의 이름과 달리 그는 무척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내일 일정에 대해 물었다. 나는 시로우마산에 갈 예정이라고 답했다. “내일 당장이요? 피곤하지 않아요? 내일 아마도 비가 올 텐데…. 여기서 시로우마산까지는 너무 멀어요. 나도 너무 오래전에 다녀와서 기억이 가물거리네요. 내일 정상까지 갈 건가요?” 도움을 주고 싶은지 이것저것 물어보던 그는 책장에서 종이 지도 한장을 꺼내오더니 나에게 건넸다. 반갑게도 시로우마산 등산 지도였다.

그는 시로우마산 정상 부근에 하쿠바(白馬) 산장이 있다고 했다. 시로우마산에 오르는 등산객이라면 보통 몇박에 걸쳐 산장에서 잠을 자며 능선 종주를 한다고. 하지만 우발적으로 떠나온 여행이라 사전에 산장 예약 따위를 했을 리 만무했고, 몇박에 걸쳐 여정을 이어가기에 내가 이곳에서 머물 수 있는 나날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보려고요.” 등산 도중 시간이 지체되어 해가 지기 시작한다거나 예상에 없는 변수를 만나면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올 계획이었다.

이튿날 새벽 4시30분 기상해 조용히 산에 갈 채비를 하고 하쿠바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제 지났던 대로변을 우회해 집과 집 사이에 난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녘 여명 속에서 하나둘 불을 밝히며 간밤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마을을 보는 것도 길을 걷는 묘미를 더했다. 간간이 개와 함께 산책하는 주민도 있었다. 그렇게 생활의 흔적을 지나는 동안 안개 사이로 사방에서 초록빛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로우마산은 어디쯤 있을까? 그저 북쪽에 시선을 두며 또 한번 마음의 산을 상상할 뿐이었다.

하쿠바역 광장 정류장에서 시로우마산 등산로 입구인 사루쿠라(猿倉) 산장까지 등산 시즌인 4월 말부터 10월 초에 한해 새벽 5시55분부터 오후 3시15분 사이에 하루 일곱번 버스가 다닌다. 나는 5시55분 첫차를 탔다. 버스 운임은 1000엔으로, 목적지인 사루쿠라 산장까지는 40분 정도 걸렸다. 이른 시간임에도 탑승객이 제법 많았다. 대체로 등산객이었으며 무겁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다. 그중에는 등산용 헬멧을 가져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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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까지 괜찮았는데…

시로우마산을 오르는 사람들.

순간 긴장감이 배가됐다. 처음 가는 산이었고, 게다가 혼자 가는 산이었다. 3000m의 산을 내가 너무 쉽게 본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버스 시각도 모르는 데다 더욱이 산장도 예약하지 않았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버스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돌이켜보면 낯선 산은 언제나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올랐다. 그리고 지금 주변에는 같은 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믿고 함께 가면 된다고 생각하니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버스는 계곡을 따라 구부러진 아스팔트 길을 천천히 거슬러 올랐다. 한층 서늘해진 기온에 몸을 사리며 바람막이 재킷의 옷깃을 여몄다. 비가 온다는 예보대로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높은 산의 위용은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차창에 비치는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며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니 어느덧 사루쿠라 산장 앞이었다. 시각은 아침 6시45분, 모든 탑승객을 쏟아내고 텅 빈 버스는 지난밤 사루쿠라 산장에서 묵은 등산객 무리를 태우고 다시 하쿠바촌으로 돌아갔다.

사루쿠라 산장의 고도는 1250m로 웬만한 산의 정상 높이였다. 하지만 시로우마산 정상의 높이가 2932m이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배낭의 어깨끈을 바짝 조이고 서둘러 산길 위에 올랐다. 새벽 첫차를 타고 등산을 시작했는데 앞서 걷고 있는 등산객 무리가 적지 않았다. 아마도 지난밤 사루쿠라 산장에서 묵은 사람들일 것이다. 초반 3㎞는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임도라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빠르게 걸으니 산행에 자신이 생겼다. 괜히 걱정했잖아, 이거 가볼 만한데? 그 순간 거대한 설계(눈이 여름철에도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형성된 높은 산골짜기)가 벽처럼 눈앞을 가로막았다.

글·사진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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